본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통해 작성된 기사입니다.
■ 기획취재/동아시아 판도 바꾼 국제전쟁 현장 서천
(1) 당의 기벌포 상륙작전
(2) 사비성의 함락과 백제
부흥군
(3) 신라의 두량이성 진공작전
(4) 포위에서 풀린 당군
(5) 제왜-나당연합군의
국제해전 백강전투 (6) 신라와 당의 기벌포 해전
당의 세계지배전략은 고구려가 있는 한 불가능했다. 이에 당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여 신라와 합병시킨 후 남쪽 전선으로부터 고구려를 압박하여 결국 고구려를 평정한다는 전략으로 바꾸어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공하여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서기 663년 백제에 주둔하던 유인원과 유인궤의 당군이 백제군에 포위되자 당은 손인사를 급파하여
유인원의 백제 주둔군을 도왔다. 신라는 이를 백제를 멸할 마지막 기회로 보고 28명의 장수가 참여하는 등 군사를 총동원하여 다시
당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왜는 백제를 도와 한반도에 세력을 구축하려는 계산을 하고 마침내 출병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 4개국이 참여하는
전투가 금강하류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를 백강전투라 하는데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당과 맞서 한
축을 이루었던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오게 되었다.
왜의 출병
손인사가 이끄는 7천의 당군이 백제의 포위를 뚫고 기벌포를 통해 사비성의 유인원과 합류한 직후 왜가 선박 1천여 척에 군사와 물자를 싣고
와 백강 어귀에 진을 쳤다. 이 때의 상황이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 장군 설인귀에 보내는 답서에서 나타나 있다.
“용삭 3년(663)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부성(府城)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 군사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 왜의 배 1천여 척은 백사에 정박해 있고(倭船千소 停在白沙)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일본서기>에는 구원장 려원군신(廬原君臣)이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이
전투에서 왜선 400여척이 불에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1천여 척은 과장된 것으로 보여진다.
위 기록으로 보아 왜의 수군이 금강 어귀의 기벌포에 정박해 있고 기벌포를 둘러싸고 있는 전망산과 후망산에서 백제군이 이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여기에 풍왕은 주류성에서 나와 백강에서 제왜연합군을 지휘하였다.
당의 반간계
문무왕이 28명의 장수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와 당군과 합류하였다. 사비성의 나당군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지이므로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유인궤는 주류성을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주류성은 백제군의 심장부이므로 이 성을 함락하면 다른 성들은 자연히
항복해 올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유인궤, 두상,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수군을 이끌고 웅진강구를 나와 백강으로 향했으며 신라의 문무왕과 손인사 유인원이 육군을 이끌고
백강으로 향했다. 이 때 유인궤는 백제의 진영에 몰래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이 꾀었다.
"풍왕은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아 자신을 옹립하고 공이 있는 복신을 죽였거늘 하물며 다른 장수들이야 오죽하리요. 당은 원래 백제의 땅을
가지려 함이 아니라 오직 백제가 고구려와 한편이 되는 것이 미워서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친 것이어니와, 이제 융은 백제 선왕이 총애하는 아들로서
능히 대세를 알고 또 황제(당고종)의 신임을 얻었으므로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 대군으로 호위하여 귀국하게 하였으니 백제의 총명한 장수와 군사들은
나의 말을 믿고 융을 왕으로 받들면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이 고국을 회복하고 편안히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지마는 만일 대군에게 항거하다가는
나도 공들을 용서치 아니할 것이요, 공들은 잔인한 풍을 왕으로 받들었다가는 패하면 대군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요, 승리하면 풍의 시기를 받아
복신처럼 참혹하게 죽을 것이니 이 어찌 지혜로운 자의 취할 일이리오?"<조선상고사>
이에 복신을 따르던 남부달솔 흑치상지, 진현성주 사타상여 등이 풍왕이 복신을 죽인 것을 원망하다가 융에게 투항하여 풍왕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백강전투
<일본서기>는 백강전투의 모습을 다음과 비교적 소상하게 같이 그리고 있다.
“당(唐)의 장군이 전선 170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자와 당의 수군과 대전하였다.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하여 지켰다. 일본의 제장과 백제의 왕이 기상을 보지 아니하고 ‘우리가 선수를 쳐서 싸우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중군의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을 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이 적에게 패하였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며 수십인을 죽였다.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은 몇 사람과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피했다.”
<삼국사기>에는 “백강구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배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해수도
붉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날이 8월 27일의 일이었다.
모두 네 차례의 접전이 있었지만 제왜연합군은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첫째, <일본서기>에서 보듯 날씨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화공과 직결되는 풍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하였는데 이는 썰물을 만나 배를 움직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참패에는 제왜연합군이 당의 순군을
과소평가한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나당군의 전선은 170척인 데 비해 제왜연합군은 400척 이상이었다. 이로 인해 지나친 자만심이 화를 불러온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백강전투의 참화를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병화로 인해 즐비하던 가옥은 황폐하고 썩지 않은 시체는 풀더미와 같았다.(兵火之餘 比屋凋殘 屍如莽)”
▲ 백강전투시 각국 군사들의
진격로 주류성 함락
백강전투에서 승리한 나당연합군은 육로와 수로로 주류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이 8월 13일 쥬류성 공격에 나선 김유신의
군사들과 합류하였으며 당이 이끄는 수군은 당의 수군은 오늘의 계화도와 전북 부안의 동진반도를 통해 상륙하였다. 동진반도와 주류성이 있는 부안군
상서면 일대에는 당시의 전투상황을 그린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백강전투의 패배와 풍왕의 도피 등으로 사기가 떨어진 주류성의 백제군은 9월 7일 마침내 성을 내주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의 사직은
끊겼다.
이처럼 기벌포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좌우한 국제해전의 현장이었다. 이후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은 부여융의 꼭두각시 정부를 내세워 신라와
전쟁을 치르게 되고 676년 신라는 당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기벌포에서 당군과 다시 전투를 치르게
된다.
▲ 부안군 동진면은 옛 해안선의
낮은 구릉지대를 따라 백제시대 토성들이 띠를 두르면 해안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반곡리산성은 이들 가운데 하나이다. 백제가 나당군과
싸울 때 밥을 지어 군사들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 <삼국사기>에
왜선 천 척이 백사에 정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서면 남전리 백사마을은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는 지명이다. 전망산과 후망산으로
둘러싸인 기벌포와 2km 정도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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