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금강하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기획취재/금강하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8.10.20 12:37
  • 호수 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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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굿둑이 불러온 환경재앙

인구 3만 장항 절반이상 줄어
아직도 개발독재, 군산복합화력

1. 일제의 금강하구 개조
2. 개발성장주의와 금강하구 갯벌
3. 끝없이 쌓이는 토사문제
4. 제련소가 남긴 것
5. 국립생태원과 해양생물박물관
6. 금강하구와 지속가능한 경제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가주도의 강력한 개발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절대 빈곤에서 탈출하였지만 대미·대일의존도를 높여 자립 경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성장 위주의 개발정책은 환경 파괴를 동반하였다. 또한 국민의 가치관을 황금만능주의로 빠져들게 하였다. 서천군이 자리잡고 있는 금강 하구지역에서는 이같은 개발성장주의가 어떤 양태로 나타났으며 오늘의 서천을 어떻게 결정지었는지 살펴본다.<편집자>

   
▲ 강과 바다를 남남으로 만든 금강하굿둑. 이로 인해 영양염류의 유입이 차단돼 어족자원의 고갈을 불러왔다.

개발독재와 간척사업

정당한 방법이 아닌 쿠데타 등의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저개발국에서는 흔히 권위주의적 강권통치하에서 개발정책을 펼치는데 이러한 정치형태를 개발주의적 독재, 또는 개발독재라고 한다.

개발독재 체제에서는 ‘경제개발은 경제발전이고 경제발전은 곧 국가번영’이라는 논리가 도출되어 개발과 성장이 최고 우선 순위가 되고 정치의 민주화는 뒷전으로 밀리는 독재정치가 실시되며 인권유린, 국민의 권리제한,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 정적에 대한 테러, 노동착취 등과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개발에 따른 환경파괴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1961년부터 1979년까지의 시기는 이러한 개발독재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가 집권하자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일제 치하에서 시행되던 공유수면매립법을 부활시켜 간척사업을 벌인 일이었다. 1963년 동진강 하구에서 전북 계화도 간척사업을 벌인 이래 경기도 남양방조제, 아산만방조제, 삽교천방조제, 영산강2지구방조제 등을 잇달아 축조하였다. 이같은 간척사업은 쌀 부족으로 허덕이던 당시에는 온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추진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던 80년대부터 토목기술의 발달과 함께 간척사업은 더욱 대규모로 행해졌다. 현대건설과 동아건설이 시공한 서산지구와 김포지구 간척사업에서부터 현대건설의 시화지구에 이르기까지의 초대형 갯벌파괴는 그 동기가 어이없게도 1979년 회교혁명으로 인해 '중동에서 철수하는 건설업체의 장비활용'이었다. 재벌 건설회사들을 위해 정부가 큰 공사판을 차려준 것이다.


금강하구의 수산업의 번성

70년대 들어 본격화 된 공업화 바람으로 농촌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도시에서 농촌 인구를 흡인했던 요인보다 저미가 정책으로 인해 농촌에서 도시로 방출했던 요인이 컸다.

즉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저임금을 유지하려면 농촌에서 유입된 산업예비군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농촌황폐화 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0년대 중·후반 정점에 달했던 서천군의 인구도 70년대 들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강 하구에 자리잡은 장항은 1980년대까지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 1980년에는 장항 인구가 3만을 상회했다. 이는 장항선 철도와 함께 금강하구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금강 하구의 수산자원이 장항의 번성을 가능케 한 것이다. 국립수산과학원 갯벌연구센터는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서해 중부 해역에서 멸치 어획량이 높은 원인은 잦은 강우로 금강하구의 영양염 유입이 증가해 멸치의 먹이생물인 플랑크톤이 다량 분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사실만 보아도 금강하굿둑이 막히기 이전의 수산업의 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어획량은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어획량의 감소는 단순히 수산물 생산액의 감소에 그치지 않고 이와 관련된 산업에 영향을 미친다.

즉 어류 도·소매업, 식당, 어구제각소, 숙박업소에 이르기까지 그 여파는 크다. 대략 수산물 감소액의 10배 가량의 파급 효과를 불러오는 것으로 본다.


금강하굿둑이 가져온 재앙

환경파괴가 가져다 주는 재앙을 아랄해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있는 아랄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로 염호이다.

남한만한 넓이의 이 호수 북으로는 카자흐스탄이 있고 남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이 있다. 이 호수로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하는 시르다리야 아무다리야('다리야'는 터어키어로 강이라는 뜻임)의 큰 강이 흘러들고 있다. 이 곳은 연강수량 500mm 이하의 스텝기후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며 예로부터 유목민들이 말을 달리며 드넓은 초원을 누비며 살아온 곳이었다.

그러나 파미르 고원의 만년설이 여름이면 녹아내리기 때문에 두 강의 수량은 아주 풍부하여 사막에 가까운 건조지대를 적시고도 아랄해로 흘러들 정도였다. 그런데 강물이 1950년대 중반부터 관개에 이용되면서 아랄해는 말라가기 시작하였다.

수량이 감소하면서 원래 염호였던 아랄해의 염류의 농도는 '사해'보다 짙어져 대부분의 어류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철갑상어와 유럽잉어 등 매년 5만t의 물고기를 잡아올리던 식량창고였던 아랄해 주변 어민들은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말라 버린 호수 바닥에서 대기로 치솟아 올랐던 소금먼지가 눈처럼 떨어져 내리거나 바람을 타고 흩날려 주변의 토지가 급속히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빗물에 섞여 들면서 빈혈이나 폐질환을 유발하는 등 주민 건강도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까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 94년부터 공동으로 아랄해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관계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쉽지가 않다.

이같은 환경 재앙이 금강 하구에서 재연되고 있다. 금강 하구는 1990년에 막혔다. 금강하구둑은 길이가 1,841m, 배수갑문이 714m로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확보를 위한 담수호를 조성할 목적으로 1983년 착공하여 1990년 10월에 완공했다.

용수 취수시설이나 기반조성사업 등이 완공되지 않아 배수갑문이 개방되어 해수가 유통되다가 1994년 10월에 배수갑문을 완전 폐쇄했다.

금강하구둑의 완공과 담수호 금강호로 인해 장항-군산간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농경지가 늘어나고 침수피해가 줄어들었다.

또한 군산 등 공업지역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생태적 기능을 상실한 강은 수산자원의 고갈을 불러와 수산업이 번성했던 장항은 차츰 쇠락해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서천군 전체의 인구 감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인근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마저 막힌 후 수산물 생산의 감소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 지난 15일 장항항에 정박 중인 89톤급 안강망어선 삼성호. 한 때 장항항은 1,000여척의 어선이 드나드는 충남에서 가장 큰 어항이었다.

마지막 명줄 끊는 복합화력

이같은 환경 파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금강 하구 주민들에게 온배수를 배출하는 군산복합화력발전소가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어민들의 생존권을 도외시한 채 건설되고 있는 발전소는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 이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굿둑 아래의 갯벌은 근래 들어 수질이 개선되며 멸치, 우럭, 도다리, 전어, 숭어 등 어류들의 산란장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건설되는 발전소는 금강하구의 마지막 명줄을 끊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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