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깃국
고깃국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9.01.05 16:28
  • 호수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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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영 칼럼위원
내가 어릴 적 고깃국은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었다. 그것도 쇠고깃국은 추석날, 설날, 그리고 어른들의 생신이나 제삿날에만 먹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국이었다.

어머니는 생일날에는 미역을 잔뜩 빨아 넣고 고깃국을 끓이셨고, 다른 날은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이셨다. 무 건더기나 미역 건더기 속에 고깃점이 두어 점 숨어있어 황우도하탕(黃牛渡江湯)이라며 웃었지만 그때의 고깃국은 정말 맛있었다. 짤깃짤깃한 고기건더기를 보물처럼 찾아내어 잘근잘근 씹으면 구수하고 다다분한 국물 맛이 입안에 고였는데, 정말 맛있었다. 삼켜버리기 아까워 오래오래 씹으면 섬유질 사이사이에 붙어있던 작은 고깃점까지 떨어져 나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요즈음은 고기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돼지고기는 말 할 것도 없고, 쇠고기 역시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부식거리가 되었다. 더구나 외국에서 들여온 값이 헐한 쇠고기로 가난한 우리는 쇠고기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수입 쇠고기가 아닌데도 어렸을 적에 먹었던 질긴 쇠고기보다 맛이 없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입이 높아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들의 먹이가 옛날과 달라졌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농사꾼의 피를 이어받은 나는 소를 보면 믿음직하면서도 안쓰럽다. 어느 해 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 어린 송아지 한 마리를 사오셨다. 코뚜레를 끼워주고, 쟁기를 지워주며 녀석을 집안의 큰 식구로 만드셨다. 녀석의 등을 쓸어주고 입안을 살펴보며 흡족해하셨던 때가 아버지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고 정주영씨가 북한에 소를 보냈던 것도, 지금은 부도덕한 과학자가 되어버린 황모 박사가 소를 복제 했다는 말에 열광했던 것도 우리의 밑바닥에 소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해 우리의 소들은 정말 힘든 한해를 보냈다. 사료 값이 폭등하자 농부는 소의 큰 배를 곯리다 못해 우시장으로 끓고 나갔다. 사람들은 미친 소고기는 먹지 않겠다고 수입을 반대하느라 서울의 양초가 바닥이 났지만 그래도 수입쇠고기는 대형 마트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식당에 가서 불고기나 갈비구이를 시키려 해도, 육간에 가서 쇠고기를 사려해도 이것이 한우인지 수입고기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고깃덩어리가 주인의 반대를 무릅쓰고‘나는 한우요’ 하고 피켓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육즙을 뚝뚝 흘리며 검붉게 익어버린 고기에‘이것은 한우다’고 도장을 찍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는 소도 기가 막혀 웃었을 것이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듯 빚을 내어 빠른 말이 가면 느린 소도 따라다니며 시작한 것들이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오듯이 폭풍이 한꺼번에 몰아닥치고,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리는 꼴을 봤으니 말이다. 마소의 새끼는 시골로 보내고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라 했는데 아직 그것도 모르냐며 우릴 보고 웃었으리라. 그러나 본성이 소를 닮아 시골을 떠나는 것을 누굴 원망하랴.

금년은 소의 해이다. 쇠털 같이 많은 날은 아니지만 365일이나 되는 소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소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처럼 365일 하루하루를 그냥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처럼 연말에 가서 망치 들고 나대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일어나서 소뿔도 단김에 빼듯이 계획을 실천하러 나가야겠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사람인들 오죽하랴. 힘들 때는 서로 비빌 언덕이 되어 되어주며,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일망정 뚜벅뚜벅 정확하게 걸어가면 빈 집에 소 들어 오듯 우리의 빈 곳간도 채워지리라.

오늘은 육간에 가서 쇠고기 한칼을 끊어다가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국을 끓여 오래된 간장으로 간을 맞추어 식구들과 먹어야겠다. 그리고 소의 해 첫걸음을 씩씩하게 내딛어야겠다.

육간에 가서 이것은 꼭 확인해야겠지.

“ 이거 한우 맞나요? 하고.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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