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제
노블리스 오블리제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9.03.23 12:06
  • 호수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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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장환 칼럼위원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말로 보통 부와 권력과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집안이 바로 ‘조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불리우고 있다.

우당(友堂) 이회영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11세 후손으로 이 집안은 이항복부터 시작해서 8대동안 계속해서 판서를 배출하였다. 8명의 판서 가운데 6명은 영의정을 지냈고, 1명은 좌의정을 지냈다. 그래서 이 집안에는 재상을 지낸 이들의 행장을 모아 놓은 문집이라는 뜻의 ‘상신록’(相臣錄)이라는 이름이 붙은 특별한 문집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그 화려함을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초개처럼 버렸다. 백사의 10세 후손인 이유승(李裕承)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그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건영(健榮·1853~1940), 둘째 석영(石榮·1855~1934), 셋째 철영(哲榮·1863~1925), 넷째 회영(會榮·1867~1932), 다섯째 시영(始榮·1869~1953), 여섯째 호영(頀榮·1875~1933)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지체 높은 집안에서 자란 이들 6형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1910년 12월 혹한 속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 벌판으로 향했다. 조선왕조에서 8대 동안 판서를 지낸 집안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넷째 아들 이회영이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내린 결단이었다.

6형제에 딸린 가솔들을 전부 합하면 60명의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시영은 일찍이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 김홍집의 사위였던 그는 평안도 관찰사라는 고위 벼슬에 있었다. 그러나 형의 권유에 따라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망명길에 따라 나섰다.

당시 이들이 살았던 집은 서울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였다. 현재의 YWCA 건물과

뒤편의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의 앞부분 일대가 바로 그 집터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집뿐만 아니라 전답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조상에게 제사지내기 위한 용도의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현금이 40만원이라는 거금이었는데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 정도에 해당되는 금액이라 한다.

이들 형제들은 1911년에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 동안 약 3000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들은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 핵심 전투병력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고국에서 가져온 자금도 바닥나자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은 지난 1년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부동산 정책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를 지난 18일 발표하였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대부분 건설사와 고가?다주택자를 위한 정책이었으며,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정책은 과거보다 후퇴한 생색내기용 대책이었다는 것이다. 대학입시에서도 상류층은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모습들을 보인다. 고려대 수시에 응시했다가 탈락한 수험생 18명이 지난 17일 ‘전형 하자로 탈락했다’며 고려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의 최상류층은 ‘원정출산’을 행한 집안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나라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이 땅에서 요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국민문화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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