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길
철 길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9.04.13 12:11
  • 호수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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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만나고 싶어도 평생 나를 만나지 못하는 철길. 혼자서 아침이 오고 혼자서 밤이 오는 머언 철길을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아침처럼 밤처럼 혼자서 철길을 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평생 고독하고 외롭게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강을 건너, 들녘을 가로 질러 나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

돌아온 철길은 참으로 적막하다. 세상에 태어나 철길이 생기고 철이 들어 간이역이라는 것이 생겼나 보다. 세상을 살면서 쉬었다 갔던 머언 철길, 밤새 깜빡이던 그 간이역 불빛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우리들의 이별과 만남을, 우리들의 사연과 침묵을 보내야 했고,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그래서 종일 서 있어야 했던 철길, 그 참담한 마음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 것인가. 말없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했던 적막한 간이역은 또 어떠했을 것인가.

내 반세기를 못 볼 것 다 보며, 세상을 침묵하며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왔던 내 고향역과 철길이 이사를 했다. 저 만치라 한들 내게는 낯설고, 낯선 만큼 가슴 한 켠이 허전하다.

부모 형제를 두고, 야트막한 야산과 파란 보리밭을 두고 떠나야 했던 젊은 시절. 어머니가 쪄주신 달걀을 우겨넣으며 부모 생각으로 눈시울을 적셨던 완행열차 이등칸 창가. 그 바깥 경치는 내게는 배움의 경전이었다. 흘러가는 구름은 효경 한 구절이었고 스쳐가는 산과 들은 법구경 한 구절이었다. 구절구절마다 밑줄 긋는 완행열차의 쉰 기적 소리는 어렸을 적 어깨를 들썩였던 나의 지친 속울음이었다. 다시는 고향에 가지 말아야지 가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고향을 두고 가야만 했던 앙가슴이 오죽 뛰었으랴만 당시는 그것만이 최선의 엑서도스였다.

그렇게 성공하라 떠나 보내주었던 내 고향 철길과 간이역. 나는 그 길로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다 배우지 못하고 효경도, 법구경도 반세기를 건성으로 떼어버린 이순의 나이. 떠도는 구름도 스쳐가는 산과 들도 이제는 나에겐 그저 구름이고 산과 들일뿐이다. 부모가 아니 계시니 배움이 있을 리 없고 동생들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설움도 있을 리 없다. 그 철길은 내게는 부모의 효를 가르쳐 주었고 간이역은 내게는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는 망망대해 터엉 빈 대합실. 어스름 저녁 대합실의 불빛은 희미하지만 정겹기 그지 없다. 지난 세월이 없었던들 나는 이렇게 멀리까지 떠나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을까. 그 동안 반세기를 오고가며 울리고 갔던 기적 소리는 야트막한 야산과 파란 보리밭을 지우고 흘러가는 구름과 산, 들을 지우고, 지워진 세월 위 고향역 그 불빛도 다 지워버렸다.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 터엉 빈, 낯선 대합실의 오후 햇살만이 끊어졌다 이어졌던 지난날의 지루한 생각들을 반추해내고 있었다.

도시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던 고향 생각들도 어떤 것은 열차를 타고 갔고, 어떤 것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떤 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또 어떤 것은 넘지 못할 산을 넘고 말았다.

애처로운 생각들만 끝에 남아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내 고향 마지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나를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민들레 낮게 피고 코스모스 하늘하늘 춤추던 철길, 무작정 기다려도 정겹게 만나주었던 그 간이역은 불빛조차 터엉 비어 있다.

없어진 철길에 봄비라도 주룩주룩 내렸으면 좋겠다. 며칠 동안 흥건히도 내렸으면 좋겠다. 꽃비라도 이리저리 산과 들에 흩날렸으면 좋겠다.

내 지난 반세기의 간이역은 내 어머니의 불빛이었고, 내 지난 반세기의 철길은 만날 수 없는 내 스승이었다. 그 동안 불빛 하나로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간이역, 그 동안 한 길로만 올곧게 가르쳐 주었던 적막한 내 고향의 철길.

간이역은 내게 기다림을 가르쳐 주었고 철길은 내게 고독을 가르쳐 주었다. 내 인생의  기다림과 고독의 길고도 지친 마지막이 없었던들 지금 나는 완행열차 이등칸 창가에 앉아 사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논어나 대학쯤은 읽어야하지 않을까. 힐끗 바라 본 하늘은 원고지 싯귀 같이 눈부시게도 푸르다. 세상에서 제일 먼 것은 철길 같은 원고지 행간에 무심히 떠도는 몇 점의 흰구름이리라.

삿대도 돛대도 없는 오후의 낮달은 지금 막 그 옛날 완행 열차 이등칸 창가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시인·평론가, 중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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