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노희두 열사 50주기 추모제
초라한 노희두 열사 50주기 추모제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0.04.26 10:01
  • 호수 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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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회단체 외면, 조촐히 치러
동국대, 흉상제작 교정에 세울 예정

▲ 4.19 유영보관소에 안치된 노희두 열사 영정
1960년 3월 15일 이 땅에서 치러진 부정선거를 본 영국 ‘런던타임즈’의 한국 특파원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희망하기보다 쓰레기통에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타전했다.

그러나 그 기자는 4.19 혁명을 보고 나서는 “마치 이 나라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과 같았다.

스스로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역사적인 지난 한 주일은 외국의 비평가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한국인이 자유정부를 향유할 자격이 가지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런던 타임즈, 4월 27일)고 말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몰고 간 한국의 4월 혁명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터키 청년학생과 시민들은 우리의 4월 혁명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끝에 4월 28일 독재자 멘델레스를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이 한국국민들보다 어찌 못하랴” 그들은 이스탄불 거리에 나타난 계엄군 탱크 앞에 연좌한 채 한국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AP 통신, 4월 28일)

또한 4월 혁명은 드골정부를 주저앉힌 프랑스 학생운동과 미국 대륙을 휩쓴 대학생들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등 세계 각국을 휩쓴 학생운동의 서곡이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첫 부분이다. 대한민국은 4.19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4월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우리 고장 출신의 노희두 열사가 있다.

그는 서천초·중, 장항농고를 나와 당시 동국대학교 법학과에 재학중이었다.

동국대 4·19혁명유공계승자회 수석부회장인 김칠봉(70)씨,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친구를 잃었던 혁명 당시의 안타까운 현장을 50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60년 4월19일 오전 8시께 서울 중구 동국대 운동장. 동국대생들은 전날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이 당한 테러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당시 법학과 3학년이던 김씨는 강당과 강의실, 도서관을 돌며 “동국의 학우들이여, 공부가 머릿속에 들어옵니까?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운동장으로 집결합시다”라고 외치고 다니며 학생을 끌어모았다.
재학생 4천여명 가운데 1천명 이상이 모이자 선발대 600~700명은 오전 11시께 캠퍼스를 나왔다.

▲ 19일 오전 서천초등학교에서 열린 ‘노희두 열사 순국 50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

학생들이 을지로입구, 서울시청을 거쳐 국회의사당 주변을 지날 때 김씨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러 경무대로 가자”고 말했고 학생들은 ‘동국대학교’가 적힌 붉은색 바탕의 현수막을 들고 경무대로 방향을 틀었다.

중앙청 부근에서 경찰과 맞닥뜨린 시위대는 상수도관을 굴리며 저지선을 뚫으려 했고, 무장한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사이 무장 경찰이 사격했고 김씨의 법학과 동기인 노희두가 총알을 맞았다. 동료들이 병원으로 옮겼지만, 노씨는 끝내 숨을 거뒀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하는 과정에서 나온 첫 희생자였다고 김씨는 회상했다.

동국대 4·19혁명유공계승자회는 4·19 당시 경찰 사격으로 사망한 동국대 법학과 3학년 노희두 열사의 흉상을 제작해 다음달 4일 캠퍼스에 세울 예정이다.

지난 19일 그의 모교인 서천초등학교 한 켠에 자리잡은 노희두 열사 위령비 앞에서 ‘노희두 열사 순국 50주년 추모제’가 열렸다.

노희두 열사의 대학 동창인 김기수 4·19혁명 노희두 열사 추모위원회 위원장은 “초라해서 송구스럽다. 내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하겠다.”며 짤막한 인사말을 마치고 추모제는 바로 끝났다.

보도진을 빼면 모두 7명이 참석한 것이다. 위령비 앞에는 국화 한 다발이 달랑 놓여 있었다.

이날 참석한 노박래 6.2지방선거 서천군수 예비후보는 “추모제를 반드시 거창하게 열자는 것이 아니라 군이 참여하여 품격을 갖추어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국대 4·19혁명유공계승자회는 노희두 열사의 흉상을 제작해 다음달 4일 캠퍼스에 세울 예정이다.

<허정균 기자>
huhjk@newss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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