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제자들
고향의 제자들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0.05.31 15:46
  • 호수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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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웅 순 칼럼위원

 

▲신웅순 칼럼위원
내가 마지막 가르쳤던 초등학교, 그 6학년 제자들이 찾아 왔다. 형종, 관주, 천구, 명자, 연순, 미정, 경숙, 은희, 명순 차례로 출석을 불렀다. 편안하고 여유있는 얼굴들. 따뜻하고 정감있는 얼굴들. 이제 그들은 비로소 사랑을 줄 수 있는 나이, 용서할 수 있는 나이 불혹의 후반에 와 있었다.

 

세월이란 무엇인가. 나와 제자와의 세월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기인 강물 같은 그리움이었다. 유유히 30년 동안 쉬지 않고 흐르던 그리움이 여기 강기슭에 와 철썩이며 새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아내한테 지청구는 얻어먹지 않았을까. 남편에게 매맞지는 않았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 날 것 같은, 참으로 힘들게 살았던 고향의 마지막 제자들이었다. 그러기에 더 더욱 그들이 소중했고 애틋하기만 했다.  

세상을 걸어오느라, 달려오느라 힘은 얼마나 부쳤을 것인가. 고향의 바람도 구름도 그들 앞을 지나갔고, 타향의 소나기도 눈발도 그들 앞을 질러갔을 것이다. 불혹의 잔주름살 위로 햇빛, 달빛도 스쳐갔을 것이다.

30년이 넘었는데도 어릴 때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는지 초등학교 시절 얘기에 제자들은 시간가는 줄 몰랐다. 만남은 이렇게 세월의 나침반을 추억 속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산이 있어 그 개천이 있어, 초가집, 언덕, 둑길, 그 삼거리가 있어 더욱 그리웠던 초등학교 마지막 제자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지난 세월을 잊을 수 없어 더 더욱 그립고 보고 싶었던 초등학교 마지막 제자들.
제자들을 생각하며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그러면서도 행복했다. 남녀 간이야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사제지간은 돌아선다고 해서 돌아서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인연이라 하지 않는가.
  “여보, 오늘은 제자가 보내준 된장 맛 좀 봅시다.”
  “맛 중의 맛일 거야.”
된장은 명품이었다. 그 옛날 독사에 물렸던 그 제자가 지금은 궁중장 명인 이수자가 되어 내게 선물한 것이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는데 실제로 행복의 맛까지 보다니.
‘저하고 전통 된장하고 잘 어울리죠? 집에서도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시어른들 모시고 아이들하고 신랑 뒷바라지 하며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쁘게 살아가고 있어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편지와 함께 예쁘게 포장된 된장을 보내왔다. 된장 맛도 일품이지만 어디 그녀의 그리움에다 비할 것인가.
  “여보, 제자들이 준 소곡주도 한 잔 합시다.”
아내와 함께 제자들 얘기에 밤이 가는 줄 몰랐다.
마음으로,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던 제자들의 사랑을 생각해본다. 38년간의 긴 교직 생활 중 제일 행복했던 날은 33년만에 해후했던 스승의 날, 그날이었다. 행복이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준 내 고향 초등학교 마지막 제자들. 그동안 평생을 가르치는 일에만 매진해왔건만 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제자들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 이문 남는 장사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풍금 소리와 함께 ‘올해도 과꽃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풍금을 치고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다. ‘땡땡, 땡땡’ 수업 끝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우우우 몰려 나가는 아이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풍금 소리, 노래 소리, 종소리 그리고 그 하얀 아우성이 들려올 때까지 그들과 나는 꼬박 3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애틋한 것일수록, 서러운 것일수록 오래 걸리는 것인가.

*시조 시인 / 중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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