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낭게가 구현하는 ‘장생(長生)’
엽낭게가 구현하는 ‘장생(長生)’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2.10.08 14:31
  • 호수 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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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에 떠내려온 육지 유기물 정화
유기물의 순환이 ‘지속가능한 경제’

▲ 엽낭게의 먹이활동 흔적

 

생태계는 육지와 해양 사이에서 일어나는 유기물의 거대한 순환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육지에서 생물체가 분해되어 발생한 유기물은 강물에 의해 바다로 흘러든다. 이러한 유기물이 가장 먼저 쌓이는 곳이 갯벌이다.


조석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썰물 때 물이 빠지면 모래갯벌이 드러난다. 이 모래갯벌을 살펴보면 콩알보다도 작은 '경단'이 무수히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바로 엽낭게의 ‘작품’이다.


엽낭게가 ‘모래 경단’을 빚는 모습을 관찰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게 종류는 머리에 잠망경처럼 솟아오른 360도 전 방위를 살펴볼 수 있는 두 개의 탁월한 눈을 가지고 있다. 모래 경단이 깔려있는 곳을 보면 구멍이 뚫려 있는데 바로 엽낭게의 집이다. 사람이 움직이며 접근하면 이미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버려 볼 수 없다.


그러나 게 구멍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1분만 쪼그려 앉아 기다리면 새끼 손톱보다 작은 엽낭게들이 먹이활동을 위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도로 쏙 들어가버리고 만다. 그러나 소리는 듣지 못한다. 고함을 한번 질러 시험해볼 수도 있다.
구멍에서 나온 엽낭게는 부지런히 모래에 붙어있는 유기물을 뜯어먹고 다시 모래를 내뱉는다. 이들이 바로 전위예술처럼 펼쳐진 무수한 모래 경단들이다.


엽낭게로서는 제 몸집을 키우고 대를 이을 알을 낳기 위한 먹이활동이지만 썩기 쉬운 유기물을 청소해주는 정화작용 역할을 하고 있다.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다. 이러한 엽낭게는 새나 작은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며, 작은 물고기는 다시 큰 물고기의 먹이가 된다. 결국 먹이사슬의 최상위자인 사람에게로 그 유기물은 돌아온다. 사람이 다시 배설기관을 통해 그 유기물을 배출하면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 순환한다.

▲ 모래 알갱이에 붙은 유기물을 뜯어먹는 엽낭게

 


이같은 순환이야말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본 틀이다. 유기농을 ‘순환농법’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람이 인공으로 만든 화학물질은 이러한 자연계의 순환을 어지럽히는 암적인 존재이다. 육지에서 내버리는 온갖 플라스틱류 생활쓰레기가 바다로 흘러들어 순환되지 않고 갯벌에 쌓이고 있다. 산업화 된 사회는 대량소비와 함께 대량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고 생태계에 치명적인 산업 폐기물을 낳고 있다.


이들은 '순환'과는 거리가 멀다. 그 정점에 핵이 있다. 플라스틱류는 완전 분해되는 데 수백년이 걸린다지만 핵폐기물에는 반감기가 수만년이 되는 것들이 있다. 게다가 다 없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독성을 방출한다.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이러한 핵폐기물을 관리하려면 우리 후손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 하겠는가. 감당을 못해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바둑에서 무승부가 나는 경우가 있다. 순환패가 발생했을 경우이다. 서로 지지 않기 위해 계속 순환하는 패를 사용하다 보면 바둑은 끝나지 않는데 이를 ‘장생(長生)’이라고도 한다. 이럴 경우 무승부를 선언한다. ‘기성(碁聖)’이라 불리는 오청원은 아주 드물게 보는 이러한 장생이 발생했을 경우 “팥밥을 지어 경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무심코 해변을 걷는 발걸음이 이러한 ‘장생’을 구현하고 있는 엽낭게들의 보금자리를 짓밟는 것은 아닌지 조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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