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자유와 가정교육
위험한 자유와 가정교육
  • 뉴스서천
  • 승인 2003.02.20 00:00
  • 호수 1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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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겪은 에피소드다. 평소 가까워지고 싶었던 지인(至人)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사유인 즉 일이 있어 서천에 오게 됐는데 얼굴이나 보고 가겠다는 것이다.
시설원예가 본업인 필자는 요즈음이 농번기다. 좀체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 허나 주저함 없이 약속장소로 달려나갔다. 문단(文壇)의 명망 높은 선배의 호출이라는 특수한 조건은 둘째 치더라도, 지긋한 연세에, 멀리에서 우리 고장을 찾은 귀한 손님이라는 까닭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지인은 몸소 찾으시더니 술까지 내리셨다. 격조 높은 위로와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다.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문단이다. 풋내기 작가로서 어찌 망극할 일이 아니겠는가. 지인은 사회적 위치로 보아 자칫 권위주의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존경받으려 하기보다도 먼저 아랫사람을 챙겨 존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었으므로, 필부도 못되는 필자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때였다. 친구 사이로 보이는 두쌍의 젊은 부부가, 열살 남짓한 아이들과 함께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음식점은 넓은 하나의 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자못 산만하였던 것이다.
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모에게 아이들의 행동 제재를 은근슬쩍 요구하는 묵시적 행위였으리라. 그러나 준비된 것인지 묵살되었고, 급기야 아이가 물병을 엎어 지인의 바지가 젖는 일이 발생했다.
보다 못한 지인이 아이들에게 정숙해 줄 것을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부모의 공중도덕 부재에 대한 질타가 수반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아비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애들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당신이 뭔데? 왜 자유롭게 커야 할 우리 아이 기를 죽이느냐?” 는 것이다. 감정이 매몰차게 뒤섞인 배덕자의 어조였다.
지인은 어이가 없는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애초 아이의 자유를 탄압하거나 의로운 기운을 꺾을 충동적 의지가 없었으므로 할말이 없었으리라.
아이의 아비가 도발적으로 내뱉은 자유(自由)와 기(氣)를 살펴보자. 먼저 자유는, 남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36년 간의 일제 강점기, 피비린내 나는 이데올로기 전쟁, 군사혁명 이후 30여년 동안 이어진 군부독제, 참다못해 분연히 일어선 민중들의 민주화투쟁 등을 경험한 우리민족에게 이보다 가슴 벅찬 언어가 또 있을까.
다음으로 기는, 생활 활동을 하는데 소요되는 모든 힘을 말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에게 필요한 절대적 요소 중 하나이다. 추측컨대 젊은 아비는 자신의 2세가 어떤 구속력을 받지 않은 채 진취적 기상으로 뻗어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인의 행위가 과연 자유를 구속하는 일이었을까. 아니다. 아이의 아비가 내린 자유에 대한 정의는 위험한 해석이요 그릇된 적용이다. 추방되거나 제고해야 할 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외계로부터 가해 오는 어떤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러울 권리가 충분히 있다.
그러므로 생명만큼이나 귀한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절대 보장받고 있다. 그렇지만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에는 보이지 않는 조건이 전제돼 있다. 절대적인 만큼 조금도 맹목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유란 자율(自律)이라는 명제가 적극적으로 실천될 때 상대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곧 방종으로 흘러가 파멸에 이르게 되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 스스로 도덕률을 세워 복종할 줄 아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엄격히 교육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질서의식 없는 자유는 바로 무덤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깨닫게 해야 할 책임도 있다. 그래야만 미래의 건전한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이 움직이는 사회 역시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간? ? 여기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가 우선될 때 자유는 축복처럼 유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절제된 배려는 우리 서로가 주고받은 자유에 대한 암묵적 약속인 것이다.
다음으로 지인의 행동이 거침없이 뻗어야 할 아이의 기를 죽이는 일이었을까.
말을 바꾸자. 필자는 농민인 고로 때가 되면 오이와 호박 씨앗을 파종한다. 발아 후 일주일이 지나면 접목(接木)을 하게 되는데 연약한 어린 묘에 칼을 대는 일이 섬뜩하게 느껴질 일이다. 그렇지만 망설임이 있을 수 없다. 대목(代木)의 튼튼한 뿌리를 얻기 위한 작업으로 뿌리 깊은 나무로의 변신을 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원예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하자. 수박의 경우이다. 먼저 기세 좋게 뻗어 나가는 넝쿨을 다섯 마디에서 순지르기를 한다. 방치하면, 홀로 세력을 독차지한 넝쿨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껍질이 두껍거나 속이 비어 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적당한 세력을 가진 넝쿨에서 열매를 맺게 유도하는 것으로, 시장성이 뛰어난 과실을 얻으려는 까닭이다.
그렇다. 가정교육이란 접목이나 순지르기와 같은 것이다. 장점은 최대한 지향해야겠으나 그릇된 기운은 발견 즉시 막거나 잘라내야 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지적해 반성하게 하는 것 역시 부모의 몫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만큼 당장의 안타까움이 뒤따르리라. 허나 어쩌겠는가. 절제의 미덕도 배워야 한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인재 양성의 첫걸음으로, 일찍이 맹모(孟母)가 삼천(三遷)하면서 보여준 부모로서의 올바른 가정교육이다.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학교교육이 지성(知性)교육이라면, 부모의 가정교육은, 일탈(逸脫)의 유혹에 쉽게 물들게 되있는 인간 본성을 바로 잡는 인성(人性)교육인 것이다.
옛말에 아비에 미칠 아들 없다 했다. 부모에게 본받을 것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의식이 편협하거나 잘못됐다면, 자식의 미래는 뻔한 일이다. 일일이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간지 사회면을 뒤덮는 흉포한 청소년범죄, 일찍이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패륜 등이 그릇된 가정교육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들의 자유 인식 오류에 의해 잘못 실행되고 있다. 이를 근거해 방임으로 흘러가는 무책임한 가정교육에도 문제가 다분하다. 우리 모두 내 가정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자유를 빙자해 제멋대로 살아가지 않는가. 다시 한 번 돌이켜 신중히 점검하고, 혹 그렇다면 필히 이번 기회에 짚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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