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풀 이야기 /
■ 우리풀 이야기 /
  • 허철희/사진작가
  • 승인 2013.01.14 11:56
  • 호수 6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섶의 풀 한 포기도 예사로 볼 일 아니다

▲ 정향나무
개항과 더불어 서구인들이 제일 눈독을 들인 것은 우리의 토종 식물이다. 그들은 해외 여행길에 식물학자를 대동했을 정도로 자국 외의 토종식물에 관심을 가지고, 알게 모르게 우리의 종자를 빼돌렸다. 이들은 이미 식물도 귀한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예견했던 것이다.


‘미스김 라일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47년 미 군정청 소속 식물 채집가인 미러라는 사람이 북한산 기슭에서 한국 특산종인 정향나무의 종자를 채집해 간 뒤 품종 개량을 거쳐 1954년 ‘미스김 라일락’이라고 이름도 새로 지어 붙였다. 미국에서 관상용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단숨에 장악한 미스김 라일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도 역수입되고 있다.


국적이 바뀐 것은 미스김 라일락뿐만이 아니다. 세계녹색혁명을 불러 온 우리나라 토종 앉은뱅이밀이 그렇고, 미선나무도 미국과 영국, 일본 등지에서 조경수로 개발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또, 1910년 한라산에서 미국으로 반출된 구상나무는 키 작은 왜성나무 등으로 품종이 개량돼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이제 이들은 품종 개량 차원을 넘어 유전자를 조작하고, 살아있는 것들에도 특허를 주는 기이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초국적 기업인 몬산토는 수백 가지의 종자 특허권을 획득한 상태라고 한다. 이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종자가 다음 해에는 싹이 트지 않도록 유전자 조작하는 ‘터미네이터 기술’, 그리고 자사의 농약을 뒤집어써야만 싹이 트도록 하는 ‘트레이터 기술’을 개발해 전 세계를 상대로 종자전쟁을 벌이고 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종자의 보고'라고 자칭하지만 실속은 없어 보인다. 1990년대 중반까지 성장을 지속하던 우리 종묘산업은 IMF를 맞아 국내 대표적인 종묘사 4곳이 이들 나라에 넘어갔고, 한국 종자 시장의 70%를 이들이 점령하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식물도 자원이다’는 재인식이 요구된다.
바닷가 어디쯤의 벼랑에서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옹색하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길섶의 풀 한 포기라도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오늘도 양지바른 골짜기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이름 모를 식물이 약용이나 식량, 혹은 관상용 등의 자원으로서의 무한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