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스름한 내장이 백미…기수역 살리면 돌아온다
조선시대에 참게는 강원도를 제외한 7도 71개 고을의 토산물이었다고 한다. 서해로 흐르는 크고 작은 하천 유역, 특히 바다에 가까운 민물에서 성장하며, 가을철에 산란하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다. 기수역을 오르내리며 사는 것이다. 짠물이 섞인 기수역에서 산란, 포란하고 부화한 다음 어린 참게는 다시 민물로 올라와 성장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남긴 <자산어보>에서는 참게를 ‘천해(川蟹)’라 하고 “큰 것은 사방 3∼4치이고, 몸빛은 푸른검은색이다. 수컷은 다리에 털이 있다.
맛은 가장 좋다. 이 섬의 계곡 물에 간혹 참게가 있으며, 내 고향의 맑은 물가에 이 참게가 있다. 봄이 되면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 논두렁에 새끼를 낳고 가을이 되면 하천을 내려간다. 어부들은 얕은 여울에 가서 돌을 모아 담을 만들고 새끼로 집을 지어 그 안에 넣어두면 참게가 그 속에 들어와서 은신한다. 매일 밤 횃불을 켜고 손으로 참게를 잡는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전어지>에도 수수를 매달아 게를 잡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순조 때 나온 가정 살림에 관한 내용의 책 <규합총서>에도 여러 곳에 게를 다루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민간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궁중에서는 10년 이상이 된 참게를 궁중 간장에 담가 여러 번 장물을 달여 부은 참게장 속의 노란 창자를 전투중 뼈가 상하고 힘줄이 끊어진 장졸들의 상처회복을 위해 먹였다 한다.
이처럼 참게는 기수역이 많이 분포한 한반도에서 오랜 옛날부터 가장 흔한 종 가운데 하나였으며 참게장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먹을거리 문화였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한강 하류와 인접한 경기도 파주 게가 유명하여 한때 파주군에서는 참게의 통조림을 만든 적이 있고, 1934년 8∼10월에는 41만 4000여 개체가 잡혔다 한다.
“어릴 때 아버님이 논에 피사리하고 오실 때면 참게를 열 마리 정도 묶어서 가지고 오셨지요. 농수로에 버글버글 했던 것이 참게였습니다.”
시초면에서 태어나 자란 50대 고 아무개씨의 말이다. 서천 사람들은 이러한 참게로 참게장을 담가 먹는 문화가 어느 고장보다 성행했다. 참게장은 간장게장의 대표이다. 가을 생식기에 암놈의 등딱지 속에 단맛이 나는 장이 드는데 이 때가 맛이 가장 좋다. “정월 게는 소가 밟아도 안깨진다”는 말이 있지만 봄게는 맛이 없다.
참게장의 백미는 장이다. 게딱지 속에 들어있는 된장처럼 누르스름하게 생긴 부분을 장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게의 생식소다. 가을이 되면 양이 많아지고 맛도 좋아진다.
장이 좋은지의 여부는 보통 빛깔로 따지는데 황장, 녹장, 흑장으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노란 빛이 감도는 황장이 맛이 고소하하며 최고로 친다. 색이 짙어질수록 쓴맛이 돈다. 장을 다 파먹고 남은 껍데기에 밥을 비벼 김을 얹어먹는 맛 또한 일품이다.
게를 창자가 없다 해서 ‘무장공자(無腸公子)’라고도 부른다. “창자 없는 게가 참으로 부럽도다 / 한평생 창자 끊는 시름 모른다네”라는 싯구가 전해오기도 한다. 게들은 알을 뿜으면 내장이 다 빠지고 알만 가득 차있다. 그러나 참게는 다르다. 알을 품고 있으면서도 창자는 창자대로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화양 망월리에서 장항 원수리까지 갈밭에 득시글거리던 참게들은 애잔한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간혹 하굿둑 아래에서 옛 모습의 참게가 잡히곤 하지만 음식점에서 상시적으로 내놓을 것은 없다. 꽃게장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금강하굿둑을 개선해 해수유통을 하고 기수역을 살리면 참게들은 다시 돌아온다. 4대강사업은 이러한 참게들을 도륙내는 일이었다. 요즘 논에 농약도 많이 안친다. 참게가 돌아온다는 것은 생태계가 살아나고, 문화가 살아나고,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을 뜻한다. 참게가 다시 번성하는 것은 생태계의 복원을 의미하고 우리의 맛을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