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의 고향 방문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의 고향 방문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3.05.06 16:19
  • 호수 6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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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 때 영의정까지 오른 김육(金堉:1580~1658)은 대동법 시행에 일생을 바친 개혁 정치가였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경제 개혁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준다.
조선 태종 때 백성들이 지방 특산물로 바치던 세제인 공납제도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것이 ‘방납의 폐해’였다.


‘방납(防納)’이란 방납업자가 백성이 바쳐야 할 공물을 관가에 대신 납부하고 그 대가로 이윤을 붙여 받는 일이었다. 조선 초기에 방납의 대가로 공물의 배나 징수하여 금지시켰으나 징수의 편의성을 들어 오히려 장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방납업자와 악덕 관리가 결탁하여 관청에서 물품을 수납할 때 그 규격을 검사하면서 불합격품은 다시 바치게 하는 ‘점퇴(點退)’가 무서워 백성들은 막대한 웃돈을 주고 공물을 방납업자로 하여금 대납하도록 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내륙지방에서는 나지 않는 해산물을 바치라고 하면 어쩔 도리 없이 대납토록 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고도 이러한 방납의 폐해는 더욱 극성을 부렸다. 이에 개혁군주 광해군 때 실시한 대동법은 그야말로 ‘조세혁명’이었다. 공납을 쌀이나 포로 받는 정책을 실현시켰다. 특산물에 대한 양반들과 방납자들이 중간에서 거두는 ‘유통비용’을 절감시켰다. 이는 결국 가진 자 자는 더 내고, 없는 자는 덜 내는 효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경기도에 한정해 실시된 것이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방납업자와 결탁한 사대부가들의 수입을 줄어들게 하는 것이어서 이들의 거센 반발로 확대 시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김육은 연이어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주장했다. 대동법은 토지 1결당 백미 12두만을 납부하게 하는 세법이다. 1638년(인조 16년) 충청감사가 된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김육은 대동법의 실시가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이면서 국가 재정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시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반대로 진전이 없었다. 효종의 등극과 함께 김육이 우의정에 제수되자 김육은 효종에게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고 대동법이야말로 곤궁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구민책이라 주장했다.


효종 2년 호서지방에서도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호서대동법의 성공적인 시행에 힘을 얻어 김육은 호남으로 확대실시를 주장해 마침내 1658년(효종 9년)에 호남지역에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선조 때 이율곡에 의해 처음 주장된 이래 100년만에 하삼도까지 실시하게 된 것이다. 보수 기득권층이 누리는 제도를 개혁하기란 이처럼 지난한 일이다.


우리 고장 출신의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달 27일 고향을 찾아 고향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장거래위원회 1981년 5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중요한 사항과 이 법에 위반되는 사항에 대한 결정·처분을 하기에 앞서 이를 심의, 의결하기 위하여 발족된 기관으로 ‘경제계 내의 검찰’로 불리기까지 한다. 이에 노대래 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민주화’ 약속을 실천에 옮기는 총대를 멘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지난 달 18일 청문회에서 재벌의 순환출자구조 문제에 대해 “총수 일가가 지배력 감소없이 대규모 기업을 인수하는 행위와 편법적인 경영권 세습행위 등을 막으려면 신규 순환출자를 반드시 금지해야 한다”고 말해 개혁적인 행보의 일면을 내보이기도 했다. 이번 고향 방문에서도 경제 개혁을 위해 소신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말했다고 한다.


얼마 동안 재임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가 조선 중기의 김육과 같은 업적을 쌓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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