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처럼 질긴 여인 김정녀
모시처럼 질긴 여인 김정녀
  • 뉴스서천
  • 승인 2003.05.30 00:00
  • 호수 1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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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날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벌써부터 이마에 땀이 옹글 지게 맺히고 양 겨드랑이 사이로 자르르 흘러내린다. 윗옷을 벗어버리고 등 목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기세이다.
잠시 틈을 내 수돗물에 손을 씻어 보지만 냉큼 더위가 가라 않질 않는다. 집에 있으면 세수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발을 담그고 싶은 심정이다. 아직도 흘러내린 땀이 고스란히 옷에 배어 있어 마음이 편하질 못하다.
오늘처럼 더위가 들이 닥치면 늘 생각나는 것은 집사람의 손길이 듬뿍 담긴 한산 모시옷이 생각난다. 예전에도 한산 모시를 말하면서 소개했지만 나에게는 아버지가 입던 윗도리, 장인이 입던 윗도리, 최근 아내가 마련해 준 모시옷 이렇게 세 벌을 가지고 여름을 나고 있다. 오늘따라 후텁지근한 날씨 탓으로 한산 모시가 그립다. 아마 곧 모시옷을 입게 될 것이다. 올해는 집사람과 함께 모시옷을 입고 여름을 나고 싶다.
요즈음 집사람의 옷에는 모시로 만든 코사지가 옷의 매무새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있다. 모시의 자투리를 이용하여 만든 꽃 모양의 작은 코사지다. 또 그의 손에는 모시로 만든 지갑이 들려 있다. 지난 제14회 한산 모시 문화제 때 구입한 것들이다.
지난 여름까지 모시옷만 생각해왔던 나에게 이런 소품들이 잔잔한 감동을 던져 주었다. 이제 모시 문화가 변화해야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시옷을 통한 판촉 활동을 해왔다면 이제 생활 속의 모시옷으로 거듭나면서 우리와 친근한 모시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그런 생각들을 이미 실천하고 있는 모시 아줌마를 모시 상설전시장에 모시 문화제때 만났다. 모시 아줌마는 한산 모시궁의 대표 김정녀이다. 그녀는 작은 키에 야무지게 생겼으며 얼굴에는 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처음 만났는데 오래 전에 뵌 사람처럼 친절하고 다정다감하게 말을 하였다. 한산 모시옷을 만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사람 대접을 해 줘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이미 한산 모시가 옷 중에 옷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는 한산 모시를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한산 모시를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시 아줌마이다. 그때만이 모시가 제값을 받고 세계 속의 한국 상품으로 그 명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제품은 큼직한 모시 수의이다. 한 벌에 2백50만 원하는 수의는 오고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모시로 수의를 하면 후손들이 흰머리가 난다는 속설 때문에 수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고관대작들은 대부분 수의를 모시로 했다고 한다. 모시로 수의를 하면 잘 썩어 다른 수의와 비교가 된다는 것이다. 한산 모시로 수의를 만들어 부모님을 위해서 미리 보관하여도 좋다는 귀뜸을 잊지 않았다.
또한 전시장에는 곱게 물들인 남자 정장 한 벌, 여자 한복 한 벌, 그 외 원피스, 베갯잇, 가방, 코사지 등이 즐비하였다. 그 중 지난해 서천군 공예 대상을 받은 커튼은 명작이었다. 하나하나 자르고 이은 그 모습이 모시 사랑이 듬뿍 배어있는 작품이었다. 가는 모시올 사이로 내비친 정원의 아름다움은 시원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만든 모시옷 뿐 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소품들은 여러 번의 가위질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그 비싼 모시를 사다가 마음에 드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자르다보면 몇 필의 모시가 그대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모시를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누가 알까 두려워 모시를 얼마만큼 버렸는지 말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버린 모시를 돈으로 환산하면 정말 큰돈이라고 말하면서 비시시 웃기만 하였다. 그 속에 얼마만큼의 시련이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모시만큼이나 질기디 질긴 여인이었다. 그는 이제 생활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모시 상품을 개발해야한다는 것이다.
김정녀 씨는 본래 마서 한적굴 김동철 씨의 딸로 태어났다. 김동철 씨는 서천에서 이름난 모시 장사였기에 어려서부터 모시장사 딸이라는 말을 듣고 컸다는 것이다. 그 후 한산으로 시집을 오게되어 모시와의 인연은 더욱 깊어 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모시장사 딸이 아니라 모시의 딸이 되었다는 것이다. 집에는 많은 모시옷과 소품들이 있지 않냐고 질문을 하자 그녀는 대장간에 칼이 없듯이 모시 제품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머릿속에 한산 모시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서울과 한산을 오고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온통 한산모시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제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자르고 잇고 만드는 작업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한산 모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 왔는지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당구를 처음 배우며 당구장을 떠나지 못하였으며, 누워있으면 천장에 당구대가 놓여 있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당구를 배우지 않았던가? 끊임없는 한산 모시에 대한 고민은 김정녀의 모시 궁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의 나이 60세를 바라보고 있지만 누가 그를 60대라 부르겠는가? 젊은이 못지 않은 도전정신과 열정에
그의 가슴에 가득하다. 그에게 용기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 한산 필모시 생산도 중요하지만 모시 상품을 생산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문화활동 중 하나이다.
올 여름에는 그가 만든 한산 모시 제품이 전국적으로 아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길 기대해 봄직하다. 오늘따라 서쪽으로 난 창문을 반쯤 가리고 있는 우리 집 모시 커튼이 돋보인다.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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