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공개서한 성급했다
대통령의 공개서한 성급했다
  • 뉴스서천
  • 승인 2003.06.13 00:00
  • 호수 1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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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피를 못 잡는 언행으로 끊임없이 구설에 시달리던 노 대통령이 이번에도 도마 위를 자청했다.
자신의 후원회장이었던 이기명씨에게 띄우는 공개 서한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것이다.
요는 이렇다. 이씨의 용인 땅 특혜 의혹과 관련해 야당과 언론으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고 있는 데 대해 ‘죄송한 마음’을 전하면서, 이를 둘러싼 언론의 보도 형태에 ‘아니면 말고 식’이라며 강한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혹자의 눈엔 이런 대통령의 모습이 의리의 사나이나 잔정 많은 지도자로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의식 있는 국민들에게 깊은 사고 개입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돌출 행동이라 비난받기에 충분한 일이다.
먼저 이씨 문제를 살펴보자. 알다시피 지난 대선 과정에서 용인 땅 매각 관련 의혹이 불거져 나왔을 때, 대책 없이 잠적해 진상을 덮으려 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의혹은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은 채 야당과 언론에 연일 꼬리를 물리고 있다.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부당한 의혹 제기’ 공개 서한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검찰과 언론에 가하는 압박이요 국민에게 보내는 감성 호소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부당한 의혹으로 끝이 난다면 대통령과 당사자 이씨, ‘서민 쇼’에 놀아났다는 느낌을 차마 지우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일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현재 제기되고 있는 의혹 중 한 점이라도 사실로 드러난다면, 대통령의 책임은 상상외로 무거워진다.
도덕과 개혁의 이름으로 탄생한 참여정부의 근간이 흔들리는 치명타인 것이다. 따라서 이씨 위로서한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은 참모들에게 충분히 자문을 구했어야 옳았다.
이미 ‘노무현’은 눈물을 보이며 감성에 표를 호소하던 대선후보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의 격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청와대 홈페이지가 개인의 사사로운 공간이 아니라 투명한 국정 운영을 홍보하는 곳, 민의를 수렴하는 곳이란 사실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인식 문제다. 국민은 알 권리가 있는 만큼 언론은 신속하게 취재 보도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강제 수사권이 없으므로, 확인되거나 검증된 사실만을 보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기사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고, 오보일 경우 책임도 뒤따른다.
그러므로 노 대통령은 불만을 토로하기 전에 관련 의혹들을 낱낱이 파헤쳐 납득할 수 있도록 공개할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말고 식’은 자유 언론에 대한 중대 모독이다. 계속해서 언론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퍽 우려할 일이다.
필자와 같은 범부에게 있어 의리나 잔정은 아름답다. 그리고 웃기 위한 용담(冗談)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다르다.
국정을 운영함에 여우처럼 교활하면서도 지혜로워야 하고, 얼음같이 냉정하고 칼날처럼 날카롭게 판단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의리나 분노는 금물이다. 국민들이 못 미더워할 감성의 분출이므로 자제해야만 한다. 더구나 의리를 중용 하면 이를 끝까지 봐주는 패거리 정치를 만드는 원흉이 된다. 잔정은 법과 질서, 원칙과 소신을 배격하는 치우침을 낳게 되어 있다.
또한, 분노는 열린 귀와 두 눈을 스스로 막는 어리석은 일이므로 대의를 그릇 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의 공개 서한은 너무 성급했고, 개혁을 갈망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겐 매우 실망 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구경욱 /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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