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생선장수로 5남매 키워
40년 생선장수로 5남매 키워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5.11.23 14:33
  • 호수 7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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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3형제는 대학까지…장구3리 추영자씨

▲ ‘장한 어버이상’을 받은 추영자씨와 큰 딸 양선자씨
지난 13일 오전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사단법인 전국효도회에서 주최하는 ‘제16회 장한 어버이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종천면 장구2리에 사는 추영자씨가 상을 받았다.뉴스서천 취재팀이 지난 18일 그의 집을 방문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추영자씨는 장항읍 옥남1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엔 1941년생으로 되어있지만 실제 나이는 두 살 더 많다고 한다.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 같았으면 의료시설이 좋아 병도 아니었건만 끝내 치료를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기억도 못한다고 한다. 갓 태어난 어린 동생이 있었다.

어렵게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남매를 키우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다 한다. 옥남1리는 솔리천 하구 부근이다. 갯벌에는 바지락, 맛살 등이 지천이었다. 어머니는 갯일을 많이 다녔고 이 힘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한다.

장항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야학을 다니면서 한글을 깨쳤다.

25세 때 종천면 장구리로 시집을 왔다. 그 집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50년을 넘게 살아온 것이다. 시집을 왔지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재 장구리는 논밭이 많지만 옛날에는 산지였고 골자기에 논이 조금 있었다 한다. 10여 년 전에 작고한 남편이 젊어서 개간을 해 논 댓마지기를 마련했으나 천수답이어서 소출은 많지 않았다.

큰 딸이 태어난 이후 아들-딸-아들-아들을 두었다. 3남 2녀, 옛날에는 이상적인 자녀 수였다. 그러나 배불리 먹이고 가르칠 여력이 없었다. 장구만 갯벌에 나가 바지락이나 맛살을 조금 잡아 팔면 겨우 보리 한 됫박 식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추씨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첫차를 타고 장항 도선장으로 가 다시 배를 타고 군산 해망동에 있는 어시장으로 갔다. 생선을 도매로 떼어 큰 다라이에 담고 다시 배를 타고 장항으로 건너왔다. 이를 다시 버스에 싣고 부여 규암포 장이나 홍산장에 가서 팔았다. 버스 기사가 생선 비린내 때문에 실어주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마다 통사정을 해야 했다. 가가운 서천에도 장이 있지만 동네 사람 만나는 일이 창피하게 여겨져 멀리 부여로 가서 팔았다고 한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이 반겼다.

큰 딸 양선자씨는, “해 질 무렵 다른 집에서는 밥 먹으라고 아이들을 부르는데 우리집에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큰 딸이 동생들을 돌보아주었기 때문에 생선 팔러 다니는 일도 가능했으리라. 어머니는 “아이들이 다 착해서 속 한번 안썩였어”라며 아이들을 칭찬했다.

큰 딸 선자씨는 서울에서 살다 내려와 현재 특화시장 맞은편에서 미용실(미래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40여년을 생선을 이고 다니며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아들 셋을 모두 대학까지 가르쳤다. 이 나라 경제를 살린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추영자씨와 같은 이 땅의 어머니들이다.
큰 아들과 막내아들은 현재 서울에서 경찰에 몸담고 있고 둘째 아들은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이들이 번갈아 고향의 어머님을 찾아 뵙고 있다.

생선장수 40년을 하며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건만 추영자씨의 얼굴은 평안하고 온화해 보였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자식들도 다 잘됐다. 추씨가 베푼 덕이 마침내 발복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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