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의 마을 이야기/(11)문산면 신농리
■ 서천의 마을 이야기/(11)문산면 신농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6.22 21:04
  • 호수 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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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해안 잇는 길목에 자리잡은 신농리
"음적사, 소정방 전설 얽힌 천방사 터”

▲ 문산면 신농리 항공사진
문산면 신농리(神農里)는 본래 서천군 두산면 지역으로 신장군의 농소(農所. 농막)이 있어서 신농소, 또는 신농으로 불리웠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왕야리와 원동, 초처면의 홍현리 일부를 병합해 신농리라 했으며 문산면에 편입되었다. 문산면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 문산초등학교가 신농리에 있다. 시문중학교는 2006년에 폐교됐다.

▲ 신농1리 원동마을 전경
천방산을 낀 신농리는 3개리로 나뉘는데 문산저수지를 포함한 도마천 동쪽과 도마다리 부근이 신농1리이며, 와촌마을에서부터 천방산 아래 음적사가 있는 서쪽 골짜기가 신농2리, 신농소 마을이 신농3리이다.
신농1리에 있는 도마(渡馬)다리는 예로부터 서천군에서 길산천 질메다리와 함께 큰 다리였다. 이 다리를 넘어 부여 홍산으로 길이 이어져 있어 내륙과 해안을 잇는 역할을 했다.

백제시대에는 도마다리 아래까지는 갯골이 나 있었으며 도마천 부근은 바다였다. 지금도 풍정리에 ‘뱃고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도마다리 부근에 원이 살고 있어 이곳을 지나려면 시초에 있는 하마다리에서부터 말을 타고 오다가 내려서 걸어왔다고 하며, 이곳에 살던 원은 행인들의 편의를 보아주었다 해서 원동이라 했다고 전한다. 도마다리 남쪽 아래에 문산장이 있었다.

▲ 도마다리. 멀리 풍정리산성 천제단이 보인다.
도마다리 서쪽을 도마다릿들이라 부른다. 도마다릿들 한 가운데에 샘이 있었는데 이를 많은 사람이 먹는다 해서 ‘만인정(萬人井)’이라 불렀다.
신농소에는 옛날 신장군이 개간한 전답이 있는데 이를 신장군(申將軍) 논이라 하며, 신농소 북쪽에는 음지뜸과 양지뜸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도마다리를 건너 지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명곡고개’라 부른다.
신농소 동쪽에 있는 마을을 ‘억만촌’ 또는 ‘억밑에’라 부르는데 앞으로 큰 농토가 되어 억만인(億萬人)을 먹여 살릴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신농소 서쪽에 있는 산 이름은 ‘어리성이’이다.
신농소 북동쪽 골자기 입구 마을을 와촌, 또는 왕야(旺也), 왜말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이곳에서 기와를 구웠다 한다.
▲ 신농소 마을
신농소 남쪽에 있는 지역은 해상골이라 하는데 이는 마을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여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해상골을 게가 많아 해곡(蟹谷)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해상골에서 시초면 초현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칡고개이다. 왜말 서쪽 천방산 아래까지의 골짜기를 환둣골이라 한다. 지금은 모두 잊혀진 이름들이다.
마을에서 수암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이름이 강댕이였으며 고개 이름을 강당재라 불렀다. 지금은 금복리를 거쳐 판교로 넘어가는 2차선 도로이다.
마을 앞에 있는 문산저수지는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보를 만들었던 자리이다. 1964년 문산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저수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천방산 아래 바위 구멍에서 나오는 물을 장군수라 하는데, 옛날 신장군이 이 물을 먹고 장사가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음적사
신농2리 골짜기 끝에 태고종 소속의 음적사(陰寂寺)가 있다. 문산면 신농리에 있는 이 절의 본래 이름은 대둔사(大芚寺)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위원인 박수환 전 한산면장에 따르면 목은 이색 선생이 대둔사에서 공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대둔사라는 이름도 군사들의 주둔지였음을 말해준다.
▲ 대둔사 터였음을 알리는 빗돌
대둔사는 언제 허물어졌는지 알 수 없다. 깨진 기왓장들은 축대로 사용되었고 규모가 꽤 커보이는 석탑의 일 부분들이 마당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음적사에서만 볼수 있는 희귀한 자료가 있다. 석가모니가 41세 되던 해의 모습을 제자인 부루나 존자가 그린 그림의 사진인데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중국에서 발견한 원본은 현재 영국의 영국제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음적사 묘관 스님에 따르면 천방사는 바로 현 음적사가 있는 곳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 골짜기 일대에 많은 암자 터들이 있으며 소정방이 천 개의 방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향토사학자 유승광 박사도 “천방사는 음적사가 있는 곳이라고도 하고 시초면 초현리 절굴이라고도 하는데, 시초면 초현리 절굴은 출토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어 아직 전면 발굴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짓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 천방로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음적사 못미쳐 우측에 있다.

음적사는 한 여름에도 냉기가 가시지 않아 서천에서도 가장 시원한 골짜기에서 자리잡고 있다. 이 부근에서 바로 천방루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최근 개설되었다.
천방산의 정기를 받았음인지 신농소에서는 국회의원이 2명이나 배출되었다. 4선을 지낸 이상익씨(작고)와 백남치씨가 그들이다. 이웃 수암리는 2선을 한 노철래 전 의원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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