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희망의 나라로
가자! 희망의 나라로
  • 최현옥
  • 승인 2003.08.08 00:00
  • 호수 1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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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을 이겨낸 부부는 가뭄을 타지 않는 우물이 됐다.
인간의 깊이는 역경의 깊이와 비례한다. 가슴을 찌르는 깊은 아픔을 느끼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품이 넓어지고 인생의 진미를 맛보게 된다.
기산면 화산리에서 개를 사육하는 이수표(51·남)씨와 최영애(44·여)씨 부부 역시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지독한 불운을 안고 살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거울 삼아 노력, 비로소 인생의 진미를 맛보고 있다.
개 사육은 남이 보기에 허드레 일로 보이지만 새끼를 포함해 7∼8백 마리가 넘는 개를 대단위로 사육하며 이 일은 부부에게 천직이 됐다. 게다가 품질을 인정받아 한 달에 평균 50∼60마리의 개를 판매, 고소득을 올리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그 동안의 역경을 보상받는 듯 하다.
“23번 퇴거를 당했지만 고난은 인생의 밑거름이라 생각했고 노력만이 우리의 미래였어요”
과거의 어려웠던 삶을 털어놓는 최씨는 글썽이는 눈물에 그만 먼 산을 바라본다. 성공해 돌아오겠다며 등진 고향에 빈손으로 다시 돌아오던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어온다.
사랑하나로 결혼한지 5년이 되던 87년 경제적 어려움에 부부는 몇 년만 고생 하면 자리를 잡을 거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광양으로 이주를 했다.
단돈 30만원으로 시작한 타향살이, 방 하나에 부엌이 겸해있는 일명 ‘말집’이라 불리는 철거촌 생활은 고난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이씨는 운전사로 회사에 입사했으나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워 날품팔이를 시작했고 부인 최씨는 어려운 가정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새벽 3시 우유배달을 시작으로 건축현장에서 자재 나르기,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 안 한 일이 없었다. 바지런했던 그녀는 ‘말집’을 얻어 하숙을 치기도 했고 산밑에서 개를 키우기도 했다. 남편은 그사이 사업으로 관광버스 운행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IMF가 터지고 버스 운행 중 교통사고로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면서 다시 빈손이 됐다.
“뒤도 바라보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지병을 앓아오던 딸마저 잃게 돼 더 이상 버틸 힘이…”
그 당시 가망이 없었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꼬리를 흐리는 이씨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운 끝에 부인 최씨를 설득해 서천에 귀농 했다.
고향에 돌아온 부부는 ‘밤도깨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친척집에 얹혀 살며 농사일을 돕고 한우를 사육했다. 첫해는 가격이 폭락해 인건비도 안 나왔지만 그 다음해에는 다시 소 값이 올랐고 과거 개를 사육한 경험을 바탕으로 강아지 20마리로 지금의 보금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부부는 주먹구구식으로 개를 사육하지 않고 차별화된 방식을 도입했다. 새끼일 때는 한약재, 성견이 되면 된장을 먹였고 성장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처음 개 사육을 시작했을 때 실패도 많았지만 자식을 키우듯 정성을 들이며 노하우도 생겼다”는 부부. 그 결과 고기가 다른 영업장과 비교했을 때 육질이 쫄깃하고 맛이 좋다는 입 소문이 났고 인근 식당은 물론 서울을 비롯해 외지에서도 찾고 있다.
“개고기를 먹으면 야만인이라 불릴 정도로 보신탕은 혐오식품으로 통했지만 그것은 문화의 차이며 우리 나라에는 먹는 개가 따로 있다”는 최씨는 “문헌에서도 개고기의 약효가 인정받고 있다”고 말한다.
현행 축산물가공처리법상 개는 가축이 아니어서 도축이 안 된다는 난제로 인해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업소가 자체적으로 도축, 개고기에 대한 혐오스러움이 커진다는 이씨는 위생 처리된 개고기 전문 도축시설을 갖춘다면 개고기는 맛과 영양 어느 것도 손색없는 경쟁력을 갖춘 전통식품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아도 오뚝이처럼 일어나고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는 부부는 주어진 조건속에서 열심히 살다보니 오늘 같은 날이 왔다며 함박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요행? 바라지 마세요. 역경은 삶의 묘미를 더해주고 인생의 밑거름이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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