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청에서 열린 지난 3.1절 기념행사에서 서천 출신의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조신환(1909~1969)의 유족 조규민씨 부부를 뉴스서천 취재팀이 만났다.
“늦게나마 서훈이 이루어져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어머님 살아계실 때 이런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부인 노영래씨의 말이다. 어머님은 장수하셔서 2000년도에 돌아가셨다 한다.
조신환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1930년 4월 30일과 5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화순공원 신사에 심은 왜전나무를 쓰러뜨리고 신전의 문짝을 뜯어내어 건물을 훼손했다. 이때 그는 화순등기소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일경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다.<관련 기사 뉴스서천 2월 17일자>
그의 둘째 아들인 규민 씨는 그가 태어난 집에 그대로 살고 있는데 월남전 참전 때 부상을 입어 몸이 불편한 상태이다.
50년 전 시집온 노영래씨는 시어머니를 통해 이미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일본 신사를 때려부쉈다는 말을 들었다.
“7남매를 키우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살아가기 힘들 때 남편을 탓하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그처럼 큰 일을 한 줄을 몰랐다 한다. 규민씨 위로 누님 두 분과 형님 한 분이 있다.
“월남전에는 사병으로 참전했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지원했지요”
그의 형 규석씨는 지난해 8월 작고했다. 그는 1967년 신아일보에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으며, 1981년 문화방송을 거쳐 1988년 세계일보로 옮겨 특집부장, 생활과학부장,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수석논설위원, 논설실장 등을 지냈다. 2007년엔 한국평화언론포럼 회장을 맡기도 했다. 세계일보 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으로 재직하던 1993년엔 한국기자협회상을 수상했다.
조신환과 함께 거사를 했던 김상만은 강진 출신이다. 그는 동경 유학을 준비하며 화순의 형님에 머물고 있다가 조신환을 만나 의기투합해 이전을 앞둔 신사를 파괴한 것이다.
이들의 공적조서를 작성해 국가보훈처로 하여금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게 한 박수환 전 한산면장(국사편찬위원회 조사사료위원)은 지난 5일 강진을 방문해 김영일 강진읍장과 황호용 강진문화원장을 만나 조신환-김상만의 이른바 ‘화순불경사건’의 전말을 전해주었다.
마침 황 원장이 김상만과 같은 동네 사람이어서 그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항일투쟁 내력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르면 올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김상만도 서훈을 받게 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화순등기소에 들러 이 사실을 알려주고 당시 역사의 현장인 화순공원에 있는 신사 터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호국영령들의 혼을 위로하는 충혼탑이 서있다.
“돈이 나오는 일도 아닌데 이런 일에 적극 나서느냐는 질문도 받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사회의 혜택을 입고 나 자신이 오늘날 존재하는데 이 사회를 위해 작은 일이나마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에 따르면 서천에는 15명의 독립유공자가 유가족을 찾을 길이 없어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