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보다 높은 날씨가 이어지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유럽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어섰다고 언론이 연일 보도했다. 한여름도 선선하던 영국에 40도 폭염이 엄습하자 에어컨 모르던 영국인들은 당황했다고 한다. 도로 아스팔트와 활주로까지 부풀었고 철도 선로까지 뒤틀렸다는데, 가을로 접어드는 요즘, 일상을 회복했을까?
땅이 단단히 얼어붙은 시베리아와 위도가 같아도 멕시코만 난류 덕에 겨울에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영국은 여름이라도 20도를 넘지 않았는데, 이번 더위는 예외일까? 지구촌에 빈발하는 징후로 보면, 안심하기 어렵다. 영구동토까지 녹이는 폭염은 시베리아의 여름을 30도 넘나들게 한다. 가장 뜨거운 기온이 최근 10년에 집중된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유엔기관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는 사람이 원인의 100%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모를 리 없어도 확신이 필요했나 본데,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는다면 기상이변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시급한 대책을 각국 정부에 촉구하는데, 시민들은 당장 견디기 어렵다. 고급 자동차에 에어컨 없던 독일이 바뀌었듯, 영국도 에어컨 설치가 상식이 되리라.
2003년 여름, 프랑스를 비롯해 남부 유럽을 덮친 열파는 5만에서 7만 명을 희생시켰다, 지독한 가뭄 속의 폭염은 42도였고 가난한 계층이 주로 사망했다. 쉼터에 물과 에어컨을 준비한 요즘은 전 같지 않다지만, 수은주 높이를 갱신하는 폭염은 대책을 무색하게 만든다. 45도 폭염이 덮친 스페인에서 500여 명, 47도를 넘어선 포르투갈에서 600여 명이 사망했고 비극은 이어진다고 언론은 전했다. 49도를 돌파한 인도는 에어컨 보급률이 낮을 텐데, 얼마나 희생되었을까? 우리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다.
에어컨이 혼수품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에 속수무책인 계층이 있다고 언론이 새삼 주목했다. 독거노인이 모이는 쪽방촌이 그렇다는데, 후미진 곳은 언론의 관심사가 아니다. 쪽방촌에서 고물 선풍기로 버티는 노인에게 “부족하나마” 에어컨을 하사하는 ‘시장님’의 영상 이벤트는 눈물겨웠는데, 거기까지다. 에어컨 앞에서 폭염을 잠시 모면할 따름인데, 실외기가 토하는 열기는 쪽방촌 골목을 더욱 데운다. 늘어나는 에어컨은 전력 소비를 폭발시킨다. 화석연료가 전기 생산을 떠맡는 만큼, 폭염과 기상이변은 쪽방촌을 넘어 지구촌의 일상이 될 것이다.
다행인가? 우리나라는 체온 넘는 폭염에서 자유롭다. 아직 그렇다. 일부 지역이 아슬아슬했어도 유럽과 남아시아 같은 폭염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견딜만한 건 아니었다. 몸이 느끼는 더위는 점점 버거워진다. 앞으로 어떨까?
올여름 혼자일 때, 에어컨을 고집스레 켜지 않았다. 대신 축 늘어져 아무 일도 안 했는데, 원고 마감이 재깍재깍 다가오므로 자신할 수 없었다. 에어컨은 대단한 유혹이 아닌가. 손님 오면 스위치를 냉큼 누를 태세였는데, 기후변화가 일으키는 위험 징후는 폭염과 산불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뭄과 홍수가 예년과 달리 빈발하지만, 우리는 해수면 상승을 직시해야 한다.
대비 상황에 따라 희생자를 불평등하게 낳는 폭염과 달리, 해수면 상승은 공평하다. 해안에 마천루를 세운 국가든, 갯벌을 메워 초고층빌딩을 세운 국가든, 피해 범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한데 북반구든 남반구든, 위도 높은 지역의 해수면이 빠르게 상승한다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마다 막대한 열기를 바다에 버려서 그런가? 동북아시아의 해수면 상승은 유난히 빠르다고 덧붙인다.
그린란드 빙하가 맹렬하게 녹는다. 한반도 11배이자 평균 1.5km 두께인 그린란드 빙하는 관측 이래 최고의 더위에 걸맞게 하루 60억 톤 이상의 물을 토해냈다. 최대 저수용량이 29억 톤인 소양강 댐 수량의 두 배를 하루 만에 쏟아내니 주민은 장화 없이 버틸 수 없었다. 한반도의 60배가 넘는 남극 빙하의 상황도 비슷하다. 빙하 위의 연구기지야 안전하지만, 가장자리에 터 잡은 펭귄은 빙하가 뜯겨나가자 새끼를 잃었고, 굶주린다. 빙하가 물러난 자리에 남은 질철질척한 진흙은 펭귄 유전자에 없는 재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