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60) / 노동(老童)
■ 박일환의 낱말여행 (60) / 노동(老童)
  • 뉴스서천
  • 승인 2023.09.07 10:30
  • 호수 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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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많아도 마음은 아이’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합창단이 유명했다. 합창단원 중 일부는 졸업 후 음대로 진학해서 성악가가 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평범한 직장인 생활을 했다. 그런 가운데 또 일부는 합창에 대한 열망을 잊지 못해 OB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OBOld Boy의 약자로, 졸업생들이 모여서 만든 팀을 뜻한다. 반대로 재학생으로 이루어진 팀은 YB, Young Boy라고 한다. OBYB를 간혹 노장팀과 청년팀 정도로 구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정도는 대부분 아는 사실일 텐데, 적절한 우리말이 없어 영어를 그대로 사용하곤 한다. 국어사전 안에 대신할 만한 말이 없을까 해서 찾아보다 아래 낱말을 발견했다.

노동(老童): 나이가 많은 운동선수.

꽤 낯선 낱말이다. 한자의 뜻 그대로만 본다면 늙은 아이라고 풀어야 할 텐데, 왜 하필 운동선수를 특정해서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을까? 일본이나 중국에서 만들어 쓰던 용어를 들여온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옛 신문 기사들을 훑어보니 1920년대부터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1990년의 기사는 전국 노동(老童) 테니스 대회가 열렸음을 알리고 있다. 그때가 이미 23회이며, 50대 이상의 테니스 동호인들이 참여하는 대회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후에는 관련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직후에 대회가 중단된 모양이다. 더불어 노동(老童)이라는 말의 쓰임새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노동(老童)이 꼭 나이 든 운동선수만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을까? 용례를 보면 그런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사례도 발견된다. 192484일 자 동아일보는 ‘HRY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조선소년척후단의 야영 행사에 참여해서 느낀 소회를 담은 글을 실었다. 소년척후단은 보이 스카우트의 전신으로, 참가자는 모두 10대 소년들이었다. 30대의 필자가 그들과 어울려 3일간 생활한 기록인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지도를 하여야 될 아이에게 도로 배우게 되는 늙은 아이(老童)는 일종의 비애를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괄호 안에 쓴 老童이 운동선수를 뜻하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1959629일 자 조선일보에 색동회 동인들이 동요 <반달>의 작곡가 윤극영 씨 집에서 소파 방정환을 추념하는 모임을 가졌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거기에 노동(老童)이라는 낱말이 등장한다. 1923년에 창립한 색동회 동인들이면 다들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던 때다. ‘이 노동(老童)들은 대머리와 흰 머리도 잊은 채 어린이의 시절에 돌아가 희희낙락 환담하는이라고 한 대목을 보면 역시 운동선수와는 거리가 먼 개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시와 동요를 쓰던 이들이니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아이 동()’에 딱 맞는 호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1920년생인 철학자 김형석 씨가 쓴 백세일기라는 책에 노인들이 살아가야 할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논한 글이 나온다. 거기서 지은이는 하릴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노옹(老翁)보다는 동심으로 돌아가 청소년처럼 살아가는 노동(老童)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하고 있다.

낱말의 뜻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누가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런 의미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국어사전 속 노동(老童)에 다른 뜻이 덧붙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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