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공부에 관한 한 포기가 없는 선비들
■ 송우영의 고전산책 / 공부에 관한 한 포기가 없는 선비들
  • 송우영
  • 승인 2023.11.09 02:53
  • 호수 11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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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영/서천서당 훈장
송우영/서천서당 훈장

공부의 나라 조선에서 오로지 공부로 입지전에 오른 인물을 든다면 몽담 김득신이 유일이다. 조선 중기 시인이며 문장가인 김득신金得臣은 본관이 안동으로 자는 자공이며 호는 백곡栢谷이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김치'의 아들인데 김치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첩에서 공을 세웠던 김시민 장군의 아들이며 김시민 장군은 김득신의 조부가 된다.

김득신의 아명은 몽담夢聃인데 아버지 김치가 노자의 꿈을 꾸고 나서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엄청난 기대를 받고 태어났으나 어려서 천연두를 앓은 탓인지 10살이 넘도록 글에는 재주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가 자녀라면 7세 무렵이면 격몽요결 떼고 주자의 소학을 읽히면서 머리를 식힐겸 사략을 읽는다.

십구사략 1권이 태고太古 장으로 첫줄 글자 수라야 스물여섯 자가 전부다. 첫줄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천황씨天皇氏 이목덕以木德 세기섭제歲起攝提 무위이화無爲而化 형제십이인兄弟十二人 각일만팔천세各一萬八千歲풀어쓰면 천황씨는 나무의 덕으로 임금 노릇하여 한해를 섭제<天干>에서 시작하고 무위로써 교화하니 형제 열두 사람이 각각 일만 팔천 살을 살았더라인데 문제는 아버지가 노자를 꿈꾸고 아들을 얻었음에도 정작 그 아들 몽담 김득신은 이 첫줄조차도 못 외웠다 하니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런 그가 오늘날까지도 공부라는 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된 것은 평생 공부를 통해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다라는 기준을 온몸으로 실천해 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둔함을 알고는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켜가면서 공부하여 책 읽은 횟수를 모두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의 6대손 김유헌金由憲공이 수집 정리한 서독수기후書讀數記後라든가 9대손 김상형金相馨공이 수집 정리한 고문삼십육수독수기古文三十六數讀數記<한미경/독서왕 김득신의 독수기에 대한연구-인용> 등이 전한다.

그의 공부기록을 적어놓은 독수기讀數記에 따르면 몽담 김득신 공은 사마천 사기 첫 번째권, 백이전은 113천번 읽고<伯夷傳 讀一億一萬三千番> 대학 보망장은 2만번 읽었다 한다.<補亡章 讀二萬番> 그야말로 기염을 토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이것이 읽은 횟수만 중하다 하여 몇 번읽었느냐를 따지랴마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아버지의 훈도에 대한 자식의 노력으로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저 정도라면 돌덩어리라도 충분히 외우고도 남았을 숫자가 분명한데 그것을 인간의 의지만으로 해냈다는 것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무릎이 꿇려지는 것이다.

이쯤 되면 중국의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도 혀를 내두르고 달아날 지경이 분명하다. 김득신 공은 백이전을 1억 번이나 읽은 후에는 자신의 서재를 억만 번 글을 읽었다는 의미인 억만재億萬齋라 했다 한다. 그리고 거처하는 방의 당호를 취묵당醉墨堂이라 했다는데 이는 소동파蘇東坡의 시 석창서취묵당石槍敍醉墨堂에서 취했다. 전한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자신의 책 여유당전서에서 그를 말하길 부지런히 독서 한 사람으로 김득신을 으뜸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사실 조선 시대에는 책을 어마어마하게 읽은 선비들이 많다. 임금으로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이요, 사대부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책만 읽는 바보라는 간서치看書痴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 등 셀 수 없을 만치 많다. 오로지 공부 하나만으로 자신과 가정과 가문의 명운을 걸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둔한 사람은 있어왔다. 공자님 시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논어선진편 11-17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시야우柴也愚 삼야노參也魯 사야벽師也辟 유야언由也喭풀어쓰면 이렇다. “시는 어리석었으며, 삼은 노둔하였으며, 사는 편벽되고, 유는 거칠도다.” 쉽게 말해서 네 사람 다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네 사람은 그 누구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시는 비땅의 재상이 됐고, 은 대학 책을 썼고 공자의 손자를 가르쳐 맹자를 있게 한 인물이 됐고, 는 공자 사후 진나라로가서 현학顯學의 비조가 되어 순자荀子를 있게 했고, 는 위나라 재상이 된다. 공부에 관해서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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