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69) / 안반과 더기
■ 박일환의 낱말여행 (69) / 안반과 더기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11.16 07:26
  • 호수 11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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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대의 평평한 땅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대관령을 넘어 강릉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안반데기라는 곳이 있다. 행정지명으로는 왕산면 대기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해발 1100m 정도 되는 넓은 고원지대다. 이곳은 대표적인 고랭지 배추 재배지로 유명하며, 축구장의 280배에 해당하는 넓은 면적을 지녔다. 낮에는 드넓은 배추밭 풍광을 담기 위해, 밤에는 깨끗한 은하수 별빛을 담기 위해 사진기를 둘러메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 제법 알려진 관광 명소가 되었다. 안반데기는 지명이 독특하게 다가올 텐데, 안반과 데기가 합쳐진 말이고, 데기는 더기의 사투리다.

안반: 떡을 칠 때에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 판.
더기: 고원의 평평한 땅.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풀이이다. 둘 다 생소하게 다가오는 낱말이겠지만 뜻을 알면 둘을 합쳐 만든 지명인 안반데기의 지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안반 위에 반죽을 올려놓고 뒤집어 가면서 버무려 만드는 일이나 서로 붙들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힘을 겨루는 일을 안반뒤지기라고 한다. 안반을 강조하여 이를 때 쓰는 안반짝’, 안반처럼 넓적하고 뚱뚱한 엉덩이를 비유해서 이르는 말인 안반궁둥이도 국어사전에 들어 있다. 지금은 거의 잊히고 있는 낱말들인데, 안반에 놓고 떡메로 한 번에 칠 만한 정도 분량의 떡 덩이를 일컫는 말이 뭐냐고 물으면 모태라는 답을 내놓을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더기라는 말을 살펴보자. 더기를 고원의 평평한 땅이라고 풀이했지만 사실 고원이나 더기나 같은 말이다. 고원(高原)이라는 낱말 자체가 높은 곳에 위치한 평평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기가 순우리말이라면 고원은 한자로 표현한 말이라는 얘기다. 고원 즉 더기에 조성한 밭을 일러 더기밭이라고 하며, 더기를 줄여서 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덕보다는 더기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덕과 언덕이라는 말 사이에 상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 이상은 내 지식을 넘어서는 범위라 단정 짓기 힘들다. 넓고 평평한 땅이 고원 지대에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평지의 평평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 있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그런 뜻을 지난 낱말도 국어사전에 있다. ‘펀더기라는 말인데, 국어사전에서는 넓은 들이라는 풀이를 달아 놓고 있다.

더기라는 말을 떠올리면 함께 따라오는 지명이 있다. 김연수 소설가의 밤은 노래한다라는 작품에 만주의 용정 근처에 있던 영국더기가 나온다. 더기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높은 지대에 형성된 넓은 땅을 가리킨다. 그 앞에 왜 영국이라는 나라 이름이 붙었을까? 언뜻 생각하면 영국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서 그런 지명을 붙였을 거라고 짐작할 법하다. 하지만 영국더기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주로 거주했던 지역을 가리키던 명칭이다. 그럼에도 영국더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 캐나다가 영국령이었기 때문이다.

영국더기를 이야기하자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윤동주 시인이다. 윤동주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운 은진중학교를 다녔고, 은진중학교가 바로 영국더기 안에 있었다.(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는 영국덕이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영국더기는 말 그대로 높은 지대에 위치한 곳이다. 그렇다면 영국더기에서는 그 아래 지형이 훤히 내려다보였을 텐데, 어떤 풍광이 펼쳐졌을까?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가곡 <선구자>에 해란강이 나온다. 그 해란강이 영국더기에서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었다. 더기라는 말은 사라지는 추세지만 영국더기에서 시를 향한 꿈을 키우던 소년 윤동주를 잊지는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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