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기른다
■ 송우영의 고전산책 /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기른다
  • 송우영
  • 승인 2023.11.16 07:53
  • 호수 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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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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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를 갓 지난 자장은 인이 어떻고 예가 어떻고 이러한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저 높은 자리 하나 꿰차서 떵떵거리며 폼 나게 살고 싶은 거 그게 인생의 목표 전부였다.

오로지 그거 하나를 위해 천하를 다니다 공자라는 사람이 그 방면에 꽤 관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공자의 문도가 된 인물이다. 그가 공자의 문하에 들어와서 했다는 첫 번째 질문은 모든 제자들이 하고 싶은 질문이었으나 차마 드러내놓고 묻기는 좀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는데 논어 위정爲政2-18문장에 실려있다. 내용은 이렇다.

하루는 자장이 벼슬 구하는 공부를 스승 공자께 물으니<자장子張 학간록學干祿> 스승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왈子曰> 많이 듣되 의문나는 것이 있다면 제쳐두고<다문궐의多聞闕疑> 그 남은 것에 대해 말을 조심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고<신언기여즉과우愼言其餘則寡尤>, 많이 보되 복잡한 것이 있다면 제쳐두고<다견궐태多見闕殆> 그 남은 것에 대해 행동을 조심하면 후회가 적을 것이며<신행기여즉과회愼行其餘則寡悔>, 말에 허물이 적고<언과우言寡尤> 행동에 후회가 적다면<행과회行寡悔> 벼슬로 인한 녹봉은 그 안에 있을 것이다<녹재기중祿在其中>”

여기서 공자께서 강조하신 말씀을 찾는다면 많이 듣고 많이 보라는 다문다견多聞多見일 것이다. 공자는 자신보다 무려 48세나 어린 막내 제자 자장에게 자장의 즉문에 대한 공자의 즉답이 아닌 꽤 완곡하고 곡진한 답으로 에둘러 풀어준다. 어린 자장으로서는 이 말을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이러이러한 책을 구해서 달달달 외워서 시험에 홀랑 붙으면 출세할 수 있다라고 말씀해주시면 간단할 것을 고래로 성현의 말씀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라고 말했다지만 공자의 이런 식의 답변이 어린 자장으로서는 성에도 안찰 뿐 아니라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이게 뭔 말씀이냐고 되묻기도 뭣하고 해서 꾹 참고 있다가 다른 날 기회를 얻어 또 묻는다. 그것이 논어 마지막권 요왈편 20-2문장에 기록되어있는데 이때는 조금은 세련된 표현으로 묻는다. “어떻게 해야 정치를 할 수 있습니까?<하여사가이종정의何如斯可以從政矣>”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공부의 마지막 수업인 셈이다. 그런데 불과 십대를 막 넘은 그 나이에 정치를 묻는다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다.

공부에는 크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이렇게 네 단계의 공부로 구분한다. 유가에서 공부라함은 수기치인을 말한다. 나를 닦아 남을 이롭게 함이다. 여기서 치인治人이라 함은 문자가 말하는 사람을 다스린다는 의미보다는 더 깊은 함의를 갖는다. 치자덕야治者德也라 했다. 치라는 것은 곧 덕이라는 말이다. 이를 덕자시익야德者施益也로 풀었다. 곧 덕이란 베풀어 백성들에게 이익을 줌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려면 우선 정치하는 그 사람이 먼저 바루어야 한다.

하루는 노나라 실권자 대부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를 물으니<계강자문정어공자季康子問政於孔子> 공자는 말한다.<공자대왈孔子對曰> “정치란 바름인데<정자政者 정야正也> 윗사람이 먼저 솔선하여 바르다면<자솔이정子帥以正> 누군들 감히 바르지 않겠습니까?”<숙감부정孰敢不正.논어 안연顔淵12-17> 이를 송나라 학자 주신중朱新中의 말을 빌면 이렇게 풀었다 전한다. “사람이 곧고 바르고자 한다면<인즉위직정人則爲直正> 그것은 먼 데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기불유간원其不有干遠> 아버지가 가르쳐서 자녀가 본받는 데서 시작이다<효해제친회效孩提親誨>”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들음 곧 청이다. 에는 두 개가 있다. 경청傾聽이 있고 겸청兼聽이 있다. 경청은 어른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음을 말하는 것이며 겸청은 쓴소리도 참고 견디며 들어 나를 고치는 지경까지 이름이다. 하안何晏의 논어 주를 단 형병邢昺은 어려서 청을 익히라 한다<유시습청幼時習聽>” 청을 익힌다는 함은 공부를 한다는 말이다. 정조 때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는 사소절 동규편에서 이렇게 경책한다. “만약에 공부하기 싫어하는 어린이가 있다면<약유염고동자若有厭苦童子> 그는 끝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시종불성호인是終不成好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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