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70) / 돌베개와 풀베개
■ 박일환의 낱말여행 (70) / 돌베개와 풀베개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11.22 23:57
  • 호수 11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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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상징 돌베개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베개는 대체로 폭신하게 만든다. 그래야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베개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옛 어른들은 나무로 만든 목침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저렇게 딱딱한 걸 어떻게 베고 자나 싶었다. 나도 시험 삼아 몇 차례 베어 보았으나 머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베고 잘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목침보다 더 딱딱할 게 분명한 돌베개는 어떨까? 정말로 돌로 만든 베개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을까? 돌베개는 몰라도 도자기로 만든 베개는 꽤 많았던 모양이다. 국어사전에 그런 베개 이름이 여럿 올라 있다. 도자기로 만든 자침(瓷枕), 호랑이 모양으로 만든 도자기 베개라는 호침(虎枕), 흰 바탕에 검은 글씨를 쓴 도자기 베개라는 이서침(剺書枕) 같은 낱말들이 그렇다.

돌베개와 함께 석침(石枕)도 국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는데, 둘 다 베개 삼아 베는 돌이라고 풀이했다. 그렇다면 돌로 만든 베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베개 대신 사용하던 돌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얘기다. 돌베개라고 하면 장준하 선생부터 떠올릴 사람이 많을 듯하다. 장준하 선생은 1944년에 일본의 학도지원병으로 나섰다 탈출한 뒤 6000리에 이르는 길을 뚫고 충칭(重慶)으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 그 험난했던 과정을 기록한 회고록 제목이 돌베개였다. 탈출병의 신분으로 산중에서 쪽잠을 잘 때 어쩔 수 없이 베어야 했을 돌베개는 고난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런 돌베개를 제목으로 삼은 건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입대하기 전 결혼했던 장준하는 탈출을 계획하고 아내에게 편지를 건넸는데, 거기에 앞으로 야곱의 돌베개를 베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창세기 2810~11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여기서도 야곱이 베었다는 돌베개는 고난을 상징한다. 객지에서 고생할 때 풍찬노숙(風餐露宿)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돌베개는 그런 상황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매개물이다.

돌베개와 대척점을 이룰 만한 베개 이름으로 풀베개가 국어사전에 나온다.

풀베개: 풀로 베개처럼 만든 것.

풀베개라는 말을 들으면 천 안에 풀을 넣어 만든 베개를 떠올리기 쉬운데, 풀이를 보면 그냥 풀을 베고 잔다는 정도의 뜻으로 다가온다. 돌베개가 돌로 만든 베개가 아니라 아무 돌이나 베개 삼아 자는 걸 뜻하는 것처럼.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낱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만 올라 있는데, 예문도 제시하지 않았거니와 다른 글에서 사용한 용례를 찾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어 사전에서 한자로 된 초침(草枕)’을 찾으면 두 가지 풀이가 나온다. 하나는 여행 중에 풀을 묶어 베개 삼아 자는 상황에 빗대어 나그네의 노숙이나 여행 중의 잠자리를 비유하는 말, 다른 하나는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작품명이라고 되어 있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풀베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풀베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제목으로 쓰인 걸 그런 설명도 없이 표준국어대사전이 표제어로 올린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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