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 (76)용가방(龍哥榜)
■ 박일환의 낱말여행 / (76)용가방(龍哥榜)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4.01.11 11:52
  • 호수 11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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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을 밝히기 어려운 낱말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을 살피다 보면 이 낱말이 하필이면 왜 그런 뜻을 지니게 됐는지 몰라서 답답할 때가 있다.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라도 있으면 좋겠으나 그런 것조차 보이지 않으면 국어사전 편찬자들은 왜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갖고 있지 않은지 의아하기도 하다. 조금만 신경 써서 조사하면 친절한 풀이가 나올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다가도 목마른 내가 직접 우물을 파는 도리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용가방(龍哥榜): 사람을 조롱하는 벽보.

이 낱말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는 보통 사람의 성 뒤에 붙여 그 사람을 친근하게 혹은 얕잡아 부를 때 쓰는 접미사다. 풀이에는 사람을 조롱하는 벽보라고 했는데, 용가를 조롱하는 내용인지 아니면 용가가 붙인 벽보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왜 용가를 끌어들여 저런 낱말을 만들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한자로 된 낱말이고, ()이라고 한 걸로 보아 옛날 말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저 낱말이 쓰인 예가 있을 것이고, 별로 어렵지 않게 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조정의 일이나 관료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벽서(壁書)가 붙는 일이 종종 있었다. 용가방 역시 그와 비슷한 종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몇 차례 등장한다.

근자에 부랑한 무리들이 인물을 조롱하여 이름을 종이에다 쓰고는 용가방(龍哥榜)이라고 이름 지어 종루(鍾樓)에다가 붙이더니, 지금 또 조정 관원들의 현명하고 우매함과 잘하고 잘못한 점을 평론하여 길가에 붙이니, 이 풍습은 매우 좋지 못합니다. 또한 인물을 평론하는 일은 대간이나 재상의 소임이요, 아랫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이 아니니, 이 폐단을 커지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용가방 사건에 대해 아뢰는 대목이다. 길거리에 방을 붙였으니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이고,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설화집 고금소총(古今笑叢)에도 실려 전한다. 이 책에 따르면 조정 관리 중에 망령되고 어리석은 자 33명의 이름을 갑, , 병으로 등급을 나누어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벽서 명칭을 용가방이라고 한 까닭은 알 길이 없다. 다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니 예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예전에 용()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밤에 가다가 순관(巡官)이 정찰하는 것을 알고 다리 밑으로 와서 엎드려 피하였다. 마침 용호(龍虎)로써 경호(更號)를 삼았으므로 순관(巡官)이 다리에 이르러 용아!’ 하고 불렀다. 용이라는 성을 가진 자가 부르자마자 곧 나와 공손하게 꿇어앉으면서 말하기를,

밤에 다녀서 금하는 것을 범하였으니, 죽을죄입니다. 죽을죄입니다.” 하였다.
세상에는 이로 인하여 망령된 사람을 용가(龍家)라고 하였다.

경호(更號)는 야간에 순라군이 사용하던 암호(暗號)를 뜻한다. 이로부터 망령되고 어리석은 사람을 용가라 부르기 시작했고, 연산군 때 방을 붙인 사람이 망령된 신하들을 조롱하며 용가방이라는 용어를 썼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용가의 한자가 에서 로 바뀌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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