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동
감 동
  • 뉴스서천 기자
  • 승인 2004.06.18 00:00
  • 호수 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칼럼위원 / 양선숙
한국 기독교의 성지라 불리우는 애양원에 다녀왔다. 모내기를 끝낸 들녘은 줄을 맞춰선 군인마냥 활기차다. 저 초록의 푸르름이 뜨거운 태양볕에 잘 익고 나면 즐거운 콧노래에 춤을 추겠지.
잘 뚫린 도로를 따라 끝없이 달렸는데도 3시간 30여분만에 도착한 그곳은 정말 먼 곳이었다. 가족도 멀리한다는 나병환자들을 격리하려면 이 정도는 멀어야겠지.

지금은 여수공항이 들어서고 다른 공사가 한창이어서 인근지역과 그리 멀리 느껴지지 않고 평온함마저 들지만,  바닷가 끝에 위치한 채 격리 수용되었을 그 곳은 외로운 곳이었으리라.

애양원은 1909년 포사이드라는 선교사가 길에 쓰러져있는 나병환자를 자신의 말에 태워 광주에 있는 병원에 데려다 치료를 해주면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나환자병원이다. 나병에 걸리면 아무런 약도 없고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며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던 환자들은 소문에 소문을 듣고 한반도의 끝인 여수의 애양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다 60년대 초 DDS라는 약이 개발되면서 나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었다. 지금 애양원에는 치료를 마쳤지만 사회에 복귀가 불가능한 노인 110여명이 남아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애양원(愛養園)이 더욱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나병환자촌이라는 이름보다는 손양원목사 때문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애양원에 몸담고 있던 손목사는 나병환자들의 흐르는 고름을 닦아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졌다.

제발 가까이 오지 말라는 환자들의 부탁에도 같이 음식을 베어 나눠먹으며 심지어는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 함께 살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무엇을 위해 자신을 버리며 살았을까 의문도 가져보지만 그의 가슴에는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넓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연일 언론매체는 상실한 인간성을 고발하며 한탄한다. 부모와 자식마저 깊은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살아내는 것 자체가 힘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현 시대에 오히려 남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며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라며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두움 가운데서 소망을 노래하고 싶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지금도 나보다 힘들어하는 자들을 위로하며 함께 하는 세상을 위해 사랑을 심고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만 가득한 머리 큰 가분수의 나도 이제 그들의 어깨에 손을 얹어야겠다. 나병환자만을 취급하던 애양병원이 이제 피부과와 정형외과, 내과 등 일반인들에게 좋은 치료병원으로 거듭났듯이, 포사이드 선교사나 손양원 목사의 이타주의 정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되듯 옮겨가길 소망한다.

아주 잠깐 머물렀지만 애양원에 전해지는 사랑이 진하게 가슴을 흔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