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생은 영어박사 (9회)
내 동생은 영어박사 (9회)
  • 뉴스서천 기자
  • 승인 2004.09.10 00:00
  • 호수 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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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 정 아

동하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계속 오케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애도 참, 난 진짜 영어 하는 줄 알았다. 우리 앞 동에 3살 먹은 아이는 진짜 영어 한다더라. 그 집에 필리핀에서 온 여자가 파출부로 온대. 일부러 그런 사람을 구했다지.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잘 알아듣는다더라. “

아줌마가 뒤 돌아서며 이 말을 했을 때 엄마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걸 난 보고야 말았습니다.
하룻밤 자고 가라는 걸 아빠 핑계를 대고 엄만 짐을 챙겼습니다.
오랜만에 서울에 왔으니 외삼촌댁에도 들르자고 했었는데, 엄만 택시를 타자마자 서울역이라고 외쳤습니다.
집에 오는 내내 엄만 별 말이 없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유리창에 비친 엄마 얼굴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아빠는 이미 출근을 하신 뒤였습니다.
엄마도 동하도 피곤했는지 아빠 출근하시는 것도 모른 채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식탁에 아빠 메모가 눈에 띄었습니다.
반으로 접혀 있었지만 살짝 펴보았습니다.

“여보, 우리에게 중요한 건 영어가 아니고 우리 아이들이야. 나 다녀올게. 기운 내고, 알았지?”
나는 펼쳐 본 흔적을 지우려고 다시 살짝 접어두었습니다.
아빠의 짧은 글을 보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뻐꾹 뻐꾹” 시계가 벌써 9시를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30분 후엔 영어 학원 차를 타야하는데……. 난 엄마를 깨웠습니다.
“엄마, 엄마!”
“음, 왜?”
“나 학원?”
“무슨 학원?”
“영어 학원 늦잖아. 벌써 9시라구.”
“오늘은 그냥 쉬자. 너무 피곤해. 난 정말 너무 피곤하다. 너도 그렇잖아. 어제 우리가 기차 안에서 몇 시간을 보냈니? 우리 오늘은 하루 쉬자. 대신 오후에 엄마랑 시장에 가자. 맛있는 거 해먹자.”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였습니다.
‘우리 엄마 맞아?’ 와 ‘벌써 아빠 메모를 보신 거야?’
분명 엄마는 달라 보였습니다.

동하에게 은근히 영어를 써가며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 동안 동하가 했던 몇 개의 단어들을 복습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동하를 유모차에 태우고 시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엄마가 말했습니다.

“준하야, 우리가 너무 영어를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니? 안 써도 되는 말도 말이야. 엄만 걱정이다. 이담에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이 우리말 너무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엄만 웃지도 않고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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