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래잡기 (9회)
술래잡기 (9회)
  • 뉴스서천 기자
  • 승인 2004.12.03 00:00
  • 호수 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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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 정 아

마지막으로 나무에서  내려가기 전 마을을 휙 둘러보았습니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인지 한 눈에 마을이 들어왔습니다. 아빠가 어렸을 적 고기 잡으며 친구들과 놀았다던 개울가에 갈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사람 그림자가 눈에 잡혔습니다. 갈대 속에 들어가 있어 머리만 조금 보였는데 그 모습이 낯익었습니다.

시골에서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갔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달리 할 일이 없어 할머니 따라 밭에 나가보거나 개울을 따라 멀리까지 걸어갔다 오기 같은 것을 했습니다. 버스 정류소 옆 담뱃집 민석이랑 가끔 놀기도 했지만 민석이는 읍내에 있는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주말밖에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손에서 놓았던 모시를 삼기 시작하셨습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하얀 머리카락 같은 모시를 한 올 한 올 무릎에 올려놓고 길게 이으셨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할머니가 민석이네 집에 가서 학원비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비싸냐며 놀라시곤 아픈 다리를 끌고 집으로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김장철이 다가오자 할머니 기분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밭에 배추 농사가 아주 잘 됐다며 팔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장에 가서 사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뭘 사고 싶은지 생각해보라고 매일 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밭 배추만 잘 자란 게 아니고 온 마을의 배추가 다 잘 자라서인지, 배추 값이 한 포기에 3백원밖에 하지 않는다는 말에 할머니의 기분은 곧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소담스런 배추를 한 숨 쉬며 돌아보고 오신 날 저녁 할머니는 다른 날보다 일찍 주무셨습니다. 다리가 아프신지 가끔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누우셨는데 할머니 몸에서 흙냄새와 배추 냄새가 났습니다.

밤 10시가 좀 넘어선가,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깜짝 놀라 전화를 받으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끊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다급한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말했습니다. 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 상준이예요.”
“상…준…아…”
“어, 엄마!”
높아진 내 목소리에 놀라 잠든 할머니를 살펴보았습니다. 왠지 할머니가 깨지 않으셨으면 했습니다.
“엄마! 엄마! 어디야? 응? 어디야?”
“상준아, 잘 있는 거지? 응? 엄마가 미안해.”
“엄마, 나 데리러 올 거지? 꼭 올 거지?”
“그럼. 갈 거야. 엄마가 돈 모으면 꼭 갈 거야. 지금 돈 모으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알겠지? 그동안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야 엄마가 더 열심히 돈 벌을 수 있어. 알겠지?”
“엄마 거기 어디야? 수원이야? 응?”
“서울이야.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 전화번호 알려줄 테니까 꼭 필요할 때 전화해. 알았지? 자주는 하면 안 돼. 일하는 곳이 바쁘거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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