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기르시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기르시다”
  • 이후근 기자
  • 승인 2005.05.06 00:00
  • 호수 2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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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주인공 최규병 씨
5년 동안 세태 풍자한 글 배포

   

<최규병 씨>

허       무

父生母育 그은혜는 태산보다 높고큰데
청춘남녀 많다지만 효자효부 안보이네
시집가는 새색시는 시부모를 마다하고
장가가는 아들들은 살림나기 바쁘도다

제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싫은 표정이네
                         시끄러운 아이소리 잘한다고 손뼉치며
                         부모님의 회심소리 듣기싫어 빈정대네

                         제자식의 오줌똥은 맨손으로 주무르나
                         부모님의 기침가래 불결하여 밥못먹네
                         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손에 쥐어주나
                         부모위해 고기한근 사올줄을 모르도다

                         애완동물 병이나면 가축병원 달려가도
                         늙은부모 병이나면 그러려니 태연하고
                         열자식을 키운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귀찮스레 여겨지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아낌없이 쓰건만은
                         부모위해 쓰는돈은 하나둘씩 따져보네
                         자식들의 손을잡고 외식함도 잦건만은
                         늙은부모 위해서는 외출한번 못하도다



허무, 유행가 제목이 아니다. 부생모육(父生母育),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기르시다’ 이렇게 시작되는 게시물의 제목이다. 군내 주요한 업소와 장소에 빠짐없이 걸려있는 이 게시물을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해 글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던 기억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만들어 돌린이에 대한 궁금함과 함께.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 글의 주인공은 전 서천군이장단협의회장 최규병(57·서천 군사리)씨이다. 5월 가정의 달, 가족간 유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취지의 행사들이 허다하지만 언론 사회면은 늘 각종 근친간 범죄들 기사들이 꼬박꼬박 자리를 메워오고 있는 것이 세태이기도 하다.

나이든 부모는 당연히 혼자 살아야 하고 당사자들과 자식들만으로 이뤄진 ‘단란 가족’의 환상은 그 어떤 도덕적인 훈계, 캠페인으로도 쉽게 깨지지 않을 현재 한국사회의 주류 가족관이 돼버렸다. 최규병씨의 글에서는 이런 세태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언어로 이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올바른 가족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듣고자 그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전북 김제 출생인 최씨는 10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로된 86세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는 6남매의 장남이다. 70년도에 서천으로 이주 시작한 서천살이가 올해로 꼬박 37년째, 이제는 서천사람임을 강조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논일을 나갔다가 소나기가 쏟아지자 도롱이를 입혀주시던 친구의 부친에게서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정이 그리워져 혼자 눈물짓던 때가 지금도 생각이나 부친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이 이 글을 쓰고 배포하게 된 동기라고 밝혔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다가 돌아가신 후에야 후회한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자신의 경험으로 지적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글 제목도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의 뜻도 함께 담겨져 있는 허무라고 한다.

그러나 허무라는 제목과는 달리 그는 부모님은 늘 뒷전이고 자식에게만 온갖 정성을 쏟아 붓는 이 시대 아버지, 어머니들의 잘못된 세태를 간결하고 쉽게 풍자, 비판하고 있다. 때로는 못마땅해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엄연한 현실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최씨가 이글을 짓고 배포하기 시작한 것이 5년 전, 서천군이장단협의회장을 맡으면서이다. 처음 군내 배포를 목적으로 했지만 어떻게 알고 연락들이 오는지 전국 각처에서 이를 구하려는 문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집사람의 이해가 없었으면 어려웠지요. 때로는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항의(?)도 있었지만 잘 이해해줬어요. 또 뭘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지만 우리 서천군을 알리는 기회라는 생각에 있는 재주로 정성을 다 한 것 뿐 이예요”
어떤 이는 전화로, 편지로, 혹은 직접 찾아온 적도 수십 차례였다고 한다. 그중에는 교장선생님 등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배포를 요청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배포된 글이 얼마나 되는지는 본인도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처음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니 이를 기억할 필요도 없었으리라고 짐작 해봤다.
배포를 요청받은 글은 전국 어디라도 보내졌고 최소 5천원이 소요되는 제작비와 배달요금은 온통 최씨 차지였음은 당연한 일. 실로 그 정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유대와 장유의 질서가 중시됐던 전통적인 가족관이 붕괴되면서 홀로 사는 노인들에 대한 대책이 사회 중요이슈가 된지는 이미 오래전 일이다. 주변에 이런 노인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고 지켜봐주는 이 하나 없는 가운데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세태의 비정함이나 자식들의 몰염치만을 탓할 수는 없다. OECD에 가입한지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많은 한국 가정은 국가가 당연히 부담해야 할 사회복지차원의 부담까지 떠안고 있다.

그러나 전보다 강화된 사회복지 정책의 시행요구에 앞서 이 글처럼 부모님을 서운하게 했던 적은 없었는지 되돌아볼 때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집에서 모시고 있던 부모님을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는 요즘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최씨의 말을 한번쯤은 곰곰이 새겨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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