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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집] 광주와 국회, 그 인연의 흔적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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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집] 광주와 국회, 그 인연의 흔적 찾기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5.05.27 00:00
  • 호수 2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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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에 짓밟힌 민의의 전당

5.18 민중항쟁 25주년을 맞아 여의도통신은 국회에서 ‘광주’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국회의 과거 기록이 남아 있을 법한 헌정기념관, 국회도서관, 국회의사당 등을 샅샅이 뒤진 끝에 여의도통신 김진석 사진기자가 국회의사당 3층에서 넉 장의 색 바랜 옛날 사진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넉 장의 흑백 사진

다음은 그 색 바랜 넉 장의 사진 밑에 각각 붙어 있던 제목과 설명이다.

‘민의(民意)의 전당(殿堂)’으로 불리던 국회의사당 앞에 진주해 있는 육중한 탱크와 포신, 그 앞에 도열해 있는 군인들과 우왕좌왕하는 국회의원들, 그리고 마침내 무장한 군인들에게 국회 밖으로 쫓겨나는 국회의원들…. 그것은 탱크와 총검에 짓밟히던 1980년 5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상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능욕한 것은 탱크와 총칼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크고 깊게 우리에게 좌절의 상흔을 남긴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부터 광주학살 전후에 세 지식인이 보여준 행태를 소개하려는 이유도, 동시에 그것을 통렬한 자성의 거울로 삼자고 호소하려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 사진① 주객전도(主客顚倒): 황락주 의원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국회의원의 의사당 출입을 막고 있는 계엄군에게 호통을 치며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엄군에 의해 의사당 정문 밖으로 밀려나오고 있다.(1980.5.20)사진② 국회에 계엄군 진주: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1980년 5월 18일 국회에 계엄군이 진주하여 국회의원의 출입을 저지함으로써 5월 20일로 예정되었던 임시국회는 무산되었다(사진 : 의사당 출입을 저지 당한 국회의원들이 민관식 의장직무대리를 둘러싸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③ 5공특위·광주특위 합동청문회: 5공특위 및 광주특위 합동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증언 도중 야당 의원들로부터 욕설과 비난이 난무하여 장내가 소란해지자 문동환 위원장이 정회를 선포하고 있다.(1988.12.31)사진④ 5공비리조사 청문회: 5공비리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는 장세동 전 대통령 경호실장에게 김동주 의원(민주)이 증인석으로 가서 자료를 제시하며 신문하고 있다.(1988.11.8)
-김대중 기자의 ‘르포’

1980년 5월 24일 김대중 조선일보 기자는 광주에 있었다. 그때 시내에서는 ‘살육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는 화정동에 머물러 그 살육의 잔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진 채 안전한 곳에서 취재하는 그의 모습은 당시 한국 언론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상징한다. 그의 광주 르포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미터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중략)…

그 바리케이드를 마주보면서 6백여미터쯤 떨어진 이쪽. 도로 중앙에 철조망과 함께 ‘무기 회수반’이라는 글자가 쓰인 5개의 입간판이 길을 막고 있다. 바로 이곳이 총기의 반납을 기다리고 있는 당국의 전초선이다.”


김대중 기자에게 광주는 단지 난동자들이 설치는 무법천지의 ‘동쪽 너머’일 뿐이었다.

다만 그는 계엄군이 있는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기자로서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정황을 사실 그대로 보도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김대중 기자는 계엄군이 던져주는 보도자료와 상상력을 동원해 기사를 썼다. 김대중 기자를 포함한 한국 언론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계엄군은 5월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전남 도청을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끔찍한 무력진압 다음날인 5월 28일 조선일보는 이런 사설을 썼다.

30년 전 6·25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삽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중략)…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펜이 총과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물증이 아닐 수 없다. 부끄럽게도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이 이렇게 계엄사가 던져주는 보도자료를 가지고 후안무치한 기사를 만들어내는 동안 광주의 진실을 알린 것은 외신 기자들, ‘푸른 눈의 목격자들’이었다.

AFP 통신이 그 해 5월 25일 전 세계에 타전한 기사인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는 광주’는 이렇게 시작된다.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은 라오스나 캄보디아를 능가한다.”

라오스나 캄보디아 현장을 지켜보던 외신 기자들의 눈에 비친 광주의 인상은 ‘킬링필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김길홍 의원의 ‘서명’

민주화의 성지 광주는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권력의 흐름은 급속하게 신군부 세력을 이끌고 있는 전두환 일당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들이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새롭게 부상한 권력자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김길홍 경향신문 기자만큼 전두환 찬양에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던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는 전두환이 스스로 별 네 개를 달고 전역한 뒤 ‘체육관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인 8월 19일부터 23일까지 4회에 걸쳐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시리즈를 연재했다. 전역도 하지 않은 현역 군인을 ‘새 시대 영도자’로 만든 것이다.


이 글은 전두환의 출생과 가계부터 권력에 오르기까지의 인생역정을 기술하고 있는데, 마치 이성계의 공덕을 적은 정도전의 사초(史草)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중 몇 대목만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소백산 줄기의 용덕산 기슭 87가구가 모여 사는 내천리 3개 마을 중 내동마을이 새 지도자로 부각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고향이다. …(중략)…물의 흐름과는 달리 남에서 북으로 역곡하는 지세의 한복판이라 해서 예로부터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오고 있다.”


“진해 육사 연병장은 봄부터 가을까지 파란 클로버로 뒤덮인다. 학과 후의 자유시간이 되면 전 위원장은 마음에 맞는 생도들과 이곳에 나와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홍두 소년기의 부푼 꿈을 얘기하고 시국에 관한 토론과 갖가지 화제로 밤가는 줄 모르면서 제복의 우정을 나누었다. …(중략)…새시대의 영도자로 추대된 전두환 육군 대장은 30년간 땀이 배었지만 정든 영예의 군복을 벗고 이제 용약 구국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정의감에 투철한 이념집단과 새시대 주도세력의 뒷받침을 받고 또 스스로 청렴결백한 청선을 지녔던 까닭에 전 위원장은 국보위 상임위가 주관하는 전대미문의 사회개혁운동과 사회정화작업을 과감하게 단행할 수 있었다.”


김길홍 기자의 과감한 용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두환이 ‘체육관 대통령’에 등극하자 ‘10.26 이후 새역사 창조 주도한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후속 기사를 쓴 것이다.


마침내 ‘현대판 용비어천가’를 완간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그는 5공 시절인 1982년 청와대
언론담당 2급 비서관과 1984년 1급 비서관을 거쳐 6공 시절에는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그 후에도 지역구 의원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1995년 5.18특별법 정국 당시 신한국당 의원이었던 김길홍 의원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주도한 특별법에 서명하고 날인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조병화 시인의 ‘축시’

그뿐만이 아니다. 두 손에 묻힌 광주 시민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전두환이 ‘체육관 대통령’으로 등극하던 날 국민시인(?) 조병화는 다음과 같은 축시를 발표했다.


새시대 새역사의 통치자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 대통령

온 국민과 더불어 경축하는

이 새출발

국운이여! 영원하여라

청렴결백한 통치자

참신과감한 통치자

이념투철한 통치자

정의부동한 통치자

두뇌명석한 통치자

인품온후한 통치자

애국애족 사랑의 통치자

복지국가

부강한 나라 만들려는

이 새로운 영도

오 통치자여! 그 힘 막강하여라


망연자실! 그로부터 25년이 흘렀다. 이제 광주는 ‘슬픔’이 아닌 ‘경축’의 대상으로 격상(?)했다. 그러나 광주와 역사를 배반했던 자들이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과 ‘국민시인’으로 대접받고 평가받는 한 광주에 대한 경축은 모욕의 또 다른 이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광주, 경축 잔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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