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궐파진(厥破津) 마전도(麻田渡) 마전포(麻田浦) 지명 환원해야
 김민수
 2016-01-31 10:35:45  |   조회: 3571
첨부파일 : -
궐파진(厥破津) 마전도(麻田渡) 마전포(麻田浦) 지명 환원해야


http://blog.naver.com/msk7613


1412년 4월 22일 사복 제조(司僕 提調) 권희달(權希達)이 마전포(麻田浦)에서 고기를 잡아서 바치니, 내온(內醞) 열 병을 내려 주었다. 권희달이 일찍이 천택(川澤)에서 고기 잡기를 일삼으니 태종이 또한 허락하였던 까닭으로 한성 가까운 천택에 혹독하게 금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꼴 베고 나무하는 사람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1413년 3월 6일 태종이 상왕(上王)을 받들고 마전포(麻田浦)에서 매사냥을 구경하고, 드디어 남양주인 풍양(豐壤) 검암(儉巖)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낮에 살곶이 전관(箭串) 냇가에 이르러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광주 목사(廣州 牧使) 안노생(安魯生)이 시(詩) 1절(絶)을 바치니, 태종이 대언에게 명하여 차운(次韻)하게 하였다. 저물어서 환궁하니, 악공과 창기들이 연(輦) 앞에서 주악하였다.1417년 3월 26일 마전포(麻田浦)의 배나 뗏목을 여러 개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판을 깔아 만든 부교(浮橋)인 주양(舟梁)을 감독하여 만들게 하였는데 견실(堅實)하지 않았으므로 사재감 정(司宰監 正) 김우생(金祐生)을 파직(罷職)하였다.


1420년 9월 15일 세종이 배를 만들어 마전도(麻田渡)에 다리 놓게 하였다. 9월 16일 왕대비께서 승하하셔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릉에 장사지내려 하여 중문 밖 악차(幄次)로 나가 통곡하니, 대소 여러 관원들도 역시 모두 통곡하였다. 재궁이 중문 밖에 나가 용순(龍輴)을 타고 동쪽 문으로 나가 류거(柳車)에 올라 떠나니, 세종이 빈전 문 밖에 나와서 소연(素輦)을 타고 백관과 시위를 거느리니, 한성에 머물러 있는 여러 신하, 찬성사 류관(柳觀) 등과 공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 등이 문 밖에 전(奠)을 배설하고 하직을 고하였다. 재궁이 마전도(麻田渡)의 부교(浮橋)를 건너는데, 평지 길을 밟듯 하였다. 처음에 박자청이 부교 만들기를 청하여 상왕이 그 말을 좇으니 사람들이 모두 "안 될 일이라."하더니, 이제 와서 온 나라가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거가(車駕)가 남쪽 강가에 쉬었다가 해질 때에 산릉에 도착하여 재궁을 장전(帳殿)에 봉안(奉安)하였다. 나라의 풍속이 대개 상사는 전부터 불가(佛家)의 의식을 썼는데, 이에 이르러서 모두 고치고 일절 옛 날 예법을 따랐다.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애통하는 것을 보고 모두 슬피 울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1422년 9월 4일 재궁(梓宮)을 받들고 수강궁(壽康宮) 문을 나와 류거(柳車)에 태우고 길흉(吉凶)의 의장(儀仗)이 차례로 앞을 인도하는데, 세종은 종친을 거느리고 울면서 따라 도보로 궁문에 나와 소연(素輦)을 타고, 백관들도 도보로 따라 흥인문(興仁門)에 나오게 되고, 한성에 남아 있을 백관과 기로(耆老)와 승도(僧徒)와 생도(生徒)와 회회(回回)는 각기 문 밖에서 하직드리는데, 곡하는 소리가 들에 진동하였다. 마전포(麻田浦)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타고 물을 건넜다. 산릉(山陵)에 이르러 재궁(梓宮)을 받들어 장전(帳殿)에 모시고, 세종은 상차(喪次)로 들어갔다.1434년 3월 28일 세종이 왕세자를 거느리고 건원릉(健元陵)에 친히 제사하였다. 낮참에 광진구인 대산(臺山) 낙천정(樂天亭) 앞 뜰에 머무르고 송파구인 마전도(麻田渡) 남쪽 목장들인 목장평(牧場坪)에 머물러 자는 차(次)하였다.


1520(중종 15)년 4월 20일 이신을 추문(推問)한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10일에 처남과 함께 와서 권경을 찾으니, 권경이 나와서 말하기를 ‘네 거동을 보건대 반드시 큰 일을 일으키겠으니 빨리 멀리 떠나거라.’하기에 ‘내 아내는 어디에 있느냐?’ 물었더니 ‘네 아내는 두 마음을 가졌고 또 이런 흉년에 먹을 것을 구하기도 참으로 어려운데 아내는 두어서 무엇하느냐?’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라 비로소 멀리 떠날 뜻을 가졌습니다.마전포(麻田浦)를 건너 경기 광주 정금원(鄭金院)에 들어가 자고, 11일에 이천부(利川府) 안의 이름 모를 역원(驛院)에 이르고, 12일에 이천 음죽(陰竹) 천미천(天彌川) 가에 있는 폐원(廢院)에서 자고, 13일에 충주 가흥창(可興倉)의 해우(廨宇)에서 자고, 14일에 보은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하였습니다."하였다. 1546년 5월 28일 사복시 제조(司僕寺 提調) 이기(李芑)와 허자(許磁)가 아뢰기를 "요즈음 큰 비가 열흘 동안 내려서 살곶이인 전관(箭串)에서는 물이 불어서 많은 말이 떠내려 갔고, 화양정(華陽亭) 등처는 배로 통행을 합니다. 마전포(麻田浦) 주변에는 문지기 1명과 군사 2명이 행방 불명이니 익사한 것이 분명하고, 도성(都城)의 동산에 풀어 놓았던 말이 떠내려가다가 육지로 나오기도 했다 하니, 그 나머지는 반드시 많이 익사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조그만 일이 아니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명종이 전교하기를 "말뿐이 아니라 사람도 빠져 죽었다 하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필시(必是) 성(城) 위로 기어오르거나 나무 그루터기에 매달려 있으면서 나오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끝까지 찾아보라."하였다.1624년 2월 12일 인조가 이르기를 "이제 듣건대, 남은 적이 마전포(麻田浦)를 건너 이천(利川)으로 향하였다 하니, 여주(驪州) 등지에 빨리 사람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예조 판서 이정구가 아뢰기를 "경상 병사 신경유(申景裕)가 병마를 거느리고 행재소(行在所)에 회합하려 한다 하니, 지금 빨리 하유하여 곧바로 경기로 나아가 남은 적이 남으로 오는 것을 막게 해야 하겠습니다."하였는데 인조가 따랐다.


1637년 1월 30일 청국(淸國) 장군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남한산성(南漢山城) 밖에 와서 인조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인조가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인조가 산에서 내려가 가시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국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인조가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인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인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인조가 3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여러 관(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청국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명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인조가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인조를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청국 한(汗)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 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하자, 인조가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인조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국 사람을 시켜 의식의 순서를 적은 것을 차례에 따라 소리 높이 읽는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인조가 3회 절하며 9회 머리를 위아래로 흔드는 3배 9고두례(三拜 九叩頭禮)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조를 인도하여 진(陣)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화도인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청국 한의 말로 인조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汗)은 남쪽을 향해 앉고 인조는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국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국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여러 신(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청국 한(汗)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 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조선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국 왕자 및 여러 장(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汗)의 앞에 이르자 한(汗)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인조가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경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汗)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汗)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인조가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貂裘)를 가지고 와서 한(汗)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조선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하니, 인조가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인 1624(인조 2)년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인 초구(貂裘) 3령(三領)을 3공(三公)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5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형조 판서 심집(沈諿)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 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 것을 주는 것이다.”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그들의 어미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인조가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한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인조가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인조가 궐파진(厥破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인조가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인조를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성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1644년 6월 18일 광주 부윤 홍진문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우연히 아사(衙舍)를 수리하다가 섬돌 사이에서 흉서(凶書) 8장을 습득하여 이를 한두 아는 이에게 언급했었는데, 지금 들으니 이 일 때문에 중신(重臣)이 대죄한다 하므로 황공함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그 흉서를 봉해 올립니다."하였는데 인조가 그 소와 흉서를 추국청에 내렸다. 흉서는 모두 8장이었는데 그 한 장은 궐파진(厥破津)의 뱃사공 진부(津夫)에게 고유한 말로서 ‘부윤과 서로 절친한 사람의 행차 두 패가 영남에서 올라와 22일에는 틀림없이 삼밭나루인 마전도(麻田渡)를 건널 것이니, 미리 배를 정돈해 두었다가 일시에 나란히 건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일곱 장은 모두 장관(將官)에게 유시한 글이었는데, 혹은 수어사의 분부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총융사의 분부라 칭하기도 하면서 한성 안인 경중(京中)에 일이 있음을 빙자하여 ‘22일에는 각기 초관들을 거느리고 일제히 경중에 모여야 하니, 뒤늦게 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되어 있었다.
2016-01-31 10:35:45
1.244.142.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