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넬슨 이야기.
 구경욱
 2002-04-01 12:56:59  |   조회: 5514
첨부파일 : -

딸아이를 잠재우면서 해주었던 옛날 이야기 중에서.

-문인방에서 소설가 구경욱.-

일찍이 거룩하리만큼 뛰어난 삶을 살다가 최후를 조국을 위해 바친 영웅을 가리켜 우리는 성웅이라 부른다.

우리에겐 민족의 태양이라 불리워지는 거북선과 백의 종군의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프랑스엔 오를레앙의 처녀 쟌다크가 있고, 영국에는 해군 제독 넬슨이 있다.

나는 그들을 성웅이라 부르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특이나 나는 넬슨(Nelson, Horatio 1758-1805)의 삶을 이야기하고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이야기에 젖어 드노라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잠자던 내 감정은 슬며시 동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그의 투철한 국가관이나 삶의 가치관에 대하여 깊숙이 알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겉으로 드러난 그의 숭고한 삶 자체만 가지고도 그의 모습을 아름답게 느끼고, 그렇게 받아들이며, 존경하는 것은, 그의 드높은 애국 정신을 닮고 싶은 까닭이리라.

그는 1793년 지중해 함대장으로 있을 당시 코르시카 섬을 공략할 때 불행히도 오른쪽 눈을 잃었다. 그리고 1797년 세인트 빈센트 해전에서 이번에는 오른쪽 팔을 잃게 되고, 1803년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 된다. 그는 1805년 프랑스, 에스파니아 연합군과의 트라팔가 해전을 승리로 이끌지만, 불행히도 완벽한 승리를 목전에 둔 빅토리아호 선상에서 적탄에 맞아 목숨마저 조국 대영 제국에 바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진 넬슨 제독에 얽혀진 이야기 중 하나이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직후 넬슨 제독은 전승 기념 파티를 열었다. 자리가 자리였던 만큼 당시 대영 제국을 움직이던 명사들이 모두 모였을 것은 뻔하다.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넬슨은 전리품으로 노획한 담배 케이스를 커 내 들고 그 답지 않게 들뜬 어조로 자랑을 시작했다.

"그 동안 난,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담배 케이스를 본 일이 없었소. 이것은 단순한 담배 케이스가 아니라 예술품이요. 그것도 명품..."

커다란 다이아몬드와 흑진주로 장식된 금제(金製) 담배 케이스였다. 이로 미루어 그 값은 계산하게 힘들 정도로 고가품이어서, 누구나 탐을 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독 그렇게 자랑만 하지 말고, 우리들도 가까이 에서 구경 좀 합시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고, 넬슨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건넸다.

"과연 자랑하실 만 하외다."

"정말 화려하고 훌륭한 작품이요. 명품이라 말하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담배 케이스는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니며 무수히 감탄사를 유발시켰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넬슨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청중에게 넘겼던 케이스를 찾았다.
"내 담배 케이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했고, 청중에선 "글쎄요?" 했다. 누군가 슬쩍한 모양으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넬슨은 무척 화가 났다.

"이것들 보시오! 여기에 모인 모두가 다 신사들 이라고 믿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며 소리치자, 사람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뒷편에서 누군가 험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구야, 신사 숙녀가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이런 못된 짓을 한 불한당 놈이...?"

"어서 신사답게 내 놓으시오?! 어서?!"

금세 파티장은 담배 케이스를 찾기 위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케이스의 출처는 찾을 수가 없었고, 모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되는 난처한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젊은 장교 하나가 나서더니,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요, 난 신사의 결백을 스스로 증명하겠습니다." 하며, 자신의 호주머니를 모두 뒤집어 보였다.

"보시오. 나는 결백하오. 그러니 어서들 호주머니를 뒤집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들 하시오."

이를 시작으로 모두가 따라서 차례차례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보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평소 청렴 결백 하기로 소문난 어느 늙은 장군의 차례까지 오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몰렸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얼굴만 붉히며, 아무 소리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맨 처음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보였던 젊은 장교가 나서며,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재촉했다.

"어서 장군께서도 호주머니를 뒤집어 결백을 밝히시지요. 켕기는 구석이 없다면..."

늙은 장군은 고개를 떨구며 몸을 떨었다.

"그, 그게 말이야......"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늙은 장군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더욱 얼굴을 붉히며,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청중들을 향해 볼멘 소리를 ????

"이것들 보시오. 난 그럴 수 없소!"

"그럴 수 없다뇨? 왜 못하는 거죠?"

"난 신사요. 그 명예 때문이요."

"신사...? 명예...?"

"그렇소. 무릇 명예란 신사가 지켜야 할 최후의 것이요. 나는 보잘것없는 결백 따위를 증명키 위해 그 명예를 버리거나 더럽힐 수가 없단 말이요!"

늙은 장군은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이로서 범인은 밝혀진 샘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또 다시 술렁였다.

"저 늙은 장군은 원래 소문과 달리 저렇게 못된 사람이거든."

"맞아. 손버릇이 고약했어."

"그뿐인 줄 알아? 신사인 척 하는 저 놈팽이의 속은 음탕하기 이를 데 없다고. 첩이 이곳저곳에 열명이 넘는다고 하더구만.하하하..."

"정말? 음탕한 놈 같으니. 하하하......"

여기 저기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고, 파티장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늙은 장군은 급기야 군복을 벗어야 했다. 도둑이 되어버린 그가 사회에서 매장된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넬슨은 전승 일주년 기념 파티에 나가기 위해 작년에 입었던 파티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을 때였다.

"이게 뭐지?"

호주머니에 뭔가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꺼냈다.

"이런 세상에......!"

담배 케이스였다. 그동안 늙은 장군이 슬쩍 했으리라 믿고 있었는데 정작 그의 호주머니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 어쩐다...?"

잠시 망설이던 넬슨은, 그 길로 곧장 늙은 장군의 찾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일 년 전 관사를 떠나 버렸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을 시켜 행적을 쫓았고, 며칠 뒤 어느 빈민가에서 와병중인 늙은 장군을 찾을 수 있었다.

넬슨이 모든 일을 접어두고 그를 찾았을 땐, 남루한 옷차림의 그의 아내와 두 딸들이 맞았고, 그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늙은 장군의 몰골과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생활이었지만, 사회로부터 매장된 후 끼니조차 잇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거지꼴 그대로였다.

"제독께서 누추한 이곳엔 어인 일이요?"

"장군, 성급했던 날 원망 마시고 용서해 주시오."
넬슨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늙은 장군은 간신히 손을 내저으며,

"제독 그게 무슨 소리요. 용서라니요."

"아닙니다. 당신은 참된 신사의 명예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이야 말로 어떤 것이란 것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겁니다."

넬슨은 늙은 장군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경솔했던 파티장에서의 일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로서 그의 억울한 누명은 일 년만에 벗겨진 것이다.

곁에서 눈물을 흘리는 아내와 딸들을 힐끗 바라보던 늙은 장군이 힘없이 웃었다. 그리곤 한숨을 내쉬며,

"휴...! 신사의 명예도 좋지만, 그때는 나로서도 어쩔 도리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사정이 있었다니요?"

"실은 그날 모처럼 만에 진수성찬을 대하고 보니 나도 모르게 엉뚱한 짓을 하게 되었소."

"엉뚱한 짓이라니요...?"

"그렇습니다. 나는 본래 고지식해서 장군 자리에 있을 때에도 가난뱅이였소. 집에서 굶주리고 있을 아내와 두 딸년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라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단 말이요. 생각다 못해 남 몰래 고기와 빵 몇 조각을 손수건에 싸서 양쪽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답니다. 그래서 당당히 호주머니를 털어 보이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

넬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핑그르 도는 눈을 한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지어 쓰는 딸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폭풍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동하고 있는 것을 느꼈고, 한편으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정작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대상은 딸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채 사리사욕에 눈먼 사람들, 바로 채신머리사납게 허청거리고 있는 위정자들에게 들려줬어야 했었기 때문이다.***
E-mail : moonsan3570@hanmail.net
캐논




2002-04-01 12:56:59
61.85.101.5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