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락의 한시 ‘백저사’
그는 순조 을미생으로 계묘에 진사가 되었고 경신년에 졸했다. 천성이 관후하고 문사에 능했다고 한다.
“鵝州女兒年十五, 生長土窟纖纖紵 (한산골 아가씨 그 나이 열다섯살 토담집에 자라나서 가는 모시 짜고 있네)” 로부터 시작되는 이 한시는 시집와서 정성으로 베를 짜는 여인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시집갈 때 규슈범절, 바느질 먼저 묻지 않고 길쌈 재주 먼저 묻는다는 당시 19세기 초 한산의 생활상을 엿볼 수가 있다.
모시각은 모시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이다. 모시각을 둘러보면서 모시의 유래와 백저사를 감상하는 것도 빼놓을 수없는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모시는 백의민족의 상징이다. 잠시 모시각에 모시의 풍요를 염원하면서 한민족의 통일을 기원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신영락 묘소는 석북 묘소 뒤편 오른쪽 언덕배기에 있다. 고령신씨 후손들은 선조의 ‘영락’의 함자를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영락없다’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사의 후손답게 조상을 소중히 모시는 고령신씨의 문중 풍도를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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