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과 ‘선영’
‘고향’과 ‘선영’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1.28 00:00
  • 호수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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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장 환
국민문화연구소
사무국장

대부분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 ‘고향’이란 말은 예전처럼 그렇게 진하게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고향은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고 다시 꽉 막힐 도로사정을 걱정하며 정신없이 직장으로 돌아와야 하는 단순한 연례행사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고향’이란 의미는 마음의 안식처로서 그 역할이 더 중요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할 때 누군가에 의지하거나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그 중의 하나가 ‘고향’이다.

필자는 외국으로 유학가기 전 고향의 선영에 들러 선조들에게 일일이 외국유학을 고한 적이 있다.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그리고 그 윗대 선조들에게 차례로 고했다. 아마도 처음 가보는 외국환경에 대한 불안감을 위로받고자 하였을 것이다. 여하튼 이후 마음이 많이 안정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필자가 아들을 유학시킬 때도 선조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시켰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들은 선조들을 뵌 적은 없지만 큰 절을 하면서도 ‘자신의 아빠의 아빠’가 이렇게 많나하고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필자 역시 어린 아들에게 역사가 깊은 집안내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 뿌듯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이 조그만 기쁨도 사실 고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뿌리, 즉 ‘고향’이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사실 필자가 느끼는 행복감은 우리나라 사람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일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직계 부모의 묘소 외에 그 윗대의 묘소는 확인하지도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필자는 직계 부모의 묘소가 누대에 걸쳐 한 곳에 모여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권장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아들에게도 유언 아닌 유언을 미리 해 두었다.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고향에 묻힐 것이다. 혹시 내가 죽으면 할아버지 밑에 묻고 너도 죽으면 내 밑에 산소를 쓰거라. 또한 네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자식들에게도 선영에 차례대로 묘를 쓰라고 교육하거라”라고.

하지만 장묘제도의 변화로 이 유언이 지켜질지는 모르겠다. 그동안 비생산적이고 형식적이라는 이유로 전통적인 조상숭배사상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꼭 보존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전통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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