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다듬잇소리
어머니의 다듬잇소리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2.25 00:00
  • 호수 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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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웅 순
칼럼위원

또닥따닥, 또닥따닥, 또닥따닥, 또닥따닥, 또따따닥, 또닥따닥……
우수수 낙엽이 질 때,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릴 때 들려오는 저물녘 어머니의 다듬잇소리를 잊을 수 없다. 강약으로, 약강으로 어디쯤서는 엊박자를 놓으며 대청마루에 단정히 앉아 밤늦도록 또닥따닥 다듬이질하고 계셨던 내 어머니. 

먼 세월 어느 한 켠에서 어머니는 지금도 또닥따닥 다듬이질을 하고 계실 것만 같다. 구겨지고 때묻은 내 세월들이 아직도 남아있어 고향 어디선가에 어머니는 다듬이질 하고 계시는 것인가. 

촉촉하고 깔깔한, 향긋하고 뽀얀 광목 이불 홑청. 그 빨래줄에 앉아 지친 날개를 석양빛에 말리고 있던  빨간 고추잠자리.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유년의 한 페이지에 낙관으로 선명히 찍혀있다.

‘요산시(일본말로 하나 둘 셋)’ 하며 마른 이불 홑청을 펄럭이며 아들과 함께 마술사처럼 푸른 하늘을 쏘옥 접고 쑤욱 폈다하시던 내 어머니. 호흡이 맞지않을 땐 벌렁 뒤로 넘어지기도 했지만 몇 번 하다보면 어머니와 나는 신기하게도 궁합이 척척 맞아 떨어진다. 홑청이 펄럭일 때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산뜻하고 상쾌한, 마당 한 구석의 촉촉한 풋가을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이승에서 어머니가 내게 주신 그 짧은 가을볕은 내게는 영원한 아늑함이었고 영원한 평화로움이었다.   

풀먹인 이불 홑청에 물을 뿌린 후 가지런히 개어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어머니는 ‘복숭아 꽃이 피는 삼사월 소주 땅....’ 노래를 부르시며 이리저리 버선발을 옮겨 꾹꾹 고르게도 밟으셨다. 그리고 단정히 앉아 또닥따닥 밤 늦도록 다듬이질을 하고 계셨다.

시조의 낙구처럼 어디쯤서 엇박자를 놓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반복되는 4박자의 리듬. 그 4 박자 속에 하루가 저물고 달이 저물고 사계절이 저물어갔을 것이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얼굴 그리고 시누이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처마 끝 은하수를 바라보며 아버지를 늦도록 기다렸을 것이다. 자식들과 긴 긴 겨울을 어떻게 날까 한많은 걱정을 하셨을 것이다.

세상에 그 많은 소리들이 지천에서 들려오건만 유독 어머니의 다듬잇소리가 제일 구슬프고 아름답게 들려오는 것은 왜 그럴까.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일까. 유년의 가난을 아프도록 다듬이질을 해서 그런 것일까. 이승에서의 시시한 것들도 이별하고 나면 지독하게 아픈 추억으로 남는데 유년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던 어머니의 다듬잇 소리는 더 말해서 무엇하랴.

늘 옆에 놓고 침선했던 어머니의 다듬잇돌과 방망이는 세월의 때가 묻은 채 이젠 천덕꾸리기가 되어 베란다 한 구석에 덩그마니 남아 있다. 이사할 때마다 천길 낭떠러지 위에 떨어질 뻔 했던 다듬잇돌과 방망이. 그동안 나는 그들의 든든한 보디가드였다. 무슨 쓸모가 있어서 그런 것만도, 특별한 값어치가 있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머니와 나와의 서러운 추억 때문만도, 묵언의 약속 때문만도 아니다. 참으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글로도 다할 수 없는 지지리도 못살았던 고향에 대한 눈물빛 그리움 같은 것들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닐까.

고향에서 막걸리 값을 떼어먹은 적도 없건만 무슨 빚이 있어 무거운 다듬잇돌을 천형처럼 수십년을 끌고 다녔는가. 어머니와 어머니의 다듬잇소리는 고향의 흙으로 돌아갔건만 어머니가 쓰시던 다듬잇돌은 아직도 고향 밖 베란다 한 구석에서 짧은 저녁 햇살 한끼의 눈치밥으로 근근이 연명해가고 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 옆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왔던 다듬잇돌이 이제 와서는 어머니가 없는, 빗물이 새는 베란다 창가에서 버려질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야속하고 무심하기 짝이 없다.

또닥따닥 또닥따닥 자신의 노래까지 까마득히 잃어버린, 때자국 흐르는 다듬잇돌이 오늘따라 더욱 소중하고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왜 그럴까. 평생 두들겨만 맞다 수명이 다해 윗목 신세로 전락해버린 다듬잇돌이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도 때가 되어 물러날 줄 아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때가 되어도 물러날 줄 모르는 인간의 노욕에 비하면 한낮 돌이라 해도 얼마나 아름답고 지혜로운가.

낙엽이 우수수 지는 가을, 흰눈이 섞어치는 겨울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서러운 소리로 들려오던 다듬잇소리, 또닥따닥, 또닥따닥, 또닥따닥, 또닥따닥, 또따따닥, 또닥따닥……
밖에는 펄펄 눈이 내린다.

수십년 동안 고향 밖 변방을 떠돌면서도 언뜻언뜻 아련한 위안과 평안을 주는 것은 내 고향 어머니의 다듬잇소리 때문일 것이다. 다듬잇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슴으로만 들어야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겨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닐까.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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