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과 아이들(개불알꽃)
들꽃과 아이들(개불알꽃)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4.14 00:00
  • 호수 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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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
칼럼위원

선거 바람이 온 나라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버스 승강장에 붙은 채 아직 제거되지 않은 벽보 속의 후보자 얼굴이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보입니다. 당선자는 당당해 보이고, 낙선자는 처연해 보입니다. 시골 마을은 선거 바람과 아무 상관없이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마치 지난 가을에 잘려나간 벼 포기처럼 색깔도 소리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겨울 입성을 다 벗지 못했지만 나무는 꼼지락거리며 새순을 밀어내고, 새싹은 온힘을 다해 흙을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청정한 바람 속에 달콤한 꽃내음이 묻혀서 오고, 쌉쌀한 잎내음이 뒤따라갑니다. 묵은 등걸 같던 농부의 몸속에서도 계절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나봅니다. 호미를 챙겨들고 텃밭으로 나가는 농부의 등 뒤에 햇볕이 따사롭게 내려앉습니다.

버스 승강 장 앞 축사는 텅 비어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십 여 마리의 한우들이 순한 눈을 껌벅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는데, 사료 값을 감당 못한 주인이 모두 팔아버렸나 봅니다. 천장에 매달린 대형 선풍기는 저희들끼리 바람개비를 돌리며 심심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빈 축사 축대 밑에 개불알풀꽃이 바람에 팔랑거립니다. 수없이 많은 하늘이 꽃잎에 내려와 파랗게 빛납니다.

개불알꽃은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조그만 풀꽃입니다. 한 겨울에도 햇빛이 잘 드는 양지쪽에서 하늘을 닮은 녀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앙증맞은 그 꽃이 그렇게 걸쭉한 이름을 얻게 된 연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꽃이 진 자리에 튼실한 씨앗이 두 알 씩 마주 붙어 맺힌 모양을 보고 이름 지은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문득 우리 반 A의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깊게 골이 패인 소 터럭 색 얼굴, 툭툭 갈라진 마디에 반창고를 붙인 노인의 손마디가 빈 소 우리에 겹쳐 보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우리 아빠는 이혼했다고 말하는 A의 작고 맑은 눈이 개불알꽃에 겹쳐 보입니다.

며칠 전 늦은 시간에 A의 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손자 녀석이 숙제를 못해간다고 울어대니 어찌해야 옳으냐고 물었습니다. 남의 집 머슴살이로 잔뼈가 굵었는데,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만 해달라니, 왜 학교에서는 그런 숙제를 내느냐고 나를 탓했습니다. 내 깐에는 조부모와 사는 아이들을 배려하느라고 조부모의 어린 시절을 조사해 와도 된다고 말 한 것이었는데……. 중병으로 거동을 못하는 안노인의 병 수발에, 손자 녀석까지 거두어야 하는 노인의 굴곡 많은 삶에 나는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선자들이 고장을 위해 온 힘을 바치겠다고 장담했던 약속이 空約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우리 고장은 비록 품이 넓지는 못하지만 갈 곳 잃은 젊은이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고향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일어서고, 늙은 어버이의 힘을 덜어 줄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무처럼, 풀처럼 한자리 지키며 말없이 살아온 우리네 부모들이 한시름 놓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옛 고생이 쓰라린 상처가 아닌 추억이 되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하늘색 풀꽃 같은 아이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봅니다.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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