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생태도시로 가는 길 - (7)환경 모델도시로 탈바꿈하는 미나마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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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0.08.30 11:18
  • 호수 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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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병원인 ‘수은 중독’, 부정하는 기업과 국가

▲ 미나마타병 자료관(왼쪽)과 구마모토현 환경센터

1953년 첫 미나마타병 환자가 발생한 이후 1959년 구마모토대학 의학부는 이 병이 수은 중독에 의한 것임을 발표하였다. 이 때 조처가 취해졌더라면 미나마타병의 1백여명의 환자발생으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기업과 이를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애써 이를 부정하려다 이 병의 확산을 불러왔다. 기업과 정부가 취한 태도에 대해 알아본다.

젖먹이 아기도 발병

▲ 미나마타병 발병지역. 미나마타를 중심으로 시라누이해 연안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공장 폐수에 섞여 바다로 흘러간 메틸 수은은 플랑크톤에 흡수되고 플랑크톤은 작은 물고기의 먹이가 되었으며 이를 다시 큰 물고기가 먹고 마지막에는 사람이 먹게 된다. 이같은 먹이 연쇄에 의해 메틸 수은이 사람의 몸에 축적되어 미나마타병으로 발병하였다.

1953년 여자 아이에게서 처음 발병한 이래 1954년 미나마타의 모도에서는 고양이가 거의 전멸하였다. 1956년 5월 1일 칫소(신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 부속병원의 호소카와 하지메 원장은 원인불명의 괴질 환자 4명의 발생을 미나마타 보건소에 보고하였다. 이 날을 미나마타병 공식 발견일로 정하고 해마다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1957년 미나마타 보건소의 이토오 하수오 소장은 미나마타만에서 잡은 물고기를 고양이에 투여하여 고양이가 발병에 이르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 후생성은 이 해 9월 오염어류의 포획 및 판매를 금지하는 식품위생법을 적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미나마타만의 모든 물고기가 메칠 수은에 오염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으며 결국 기업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58년 9월 칫소 공장은 배수구를 햐쿠켄항에서 미나마타강 하류로 변경하였다. 환자들이 어부 가정에서 나왔기 때문에, 일종의 풍토병으로 원인을 몰아갔다.

▲ 미나마타만을 둘러싼 절망시설. 외부의 물고기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시설로 1977년에 설치됐으며 1995년에 철거했다.

일본 정부와 칫소 공장이 이처럼 대처하며 공장 가동을 계속하는 동안 환자는 계속 발생하여 1956년에는 43명으로 늘었다.

“한 돌이 지나고, 두 돌이 되어도 아이들은 걷는 것은 물론이고 기지도, 말하지도, 젓가락을 쥐고 먹지도 못했다. 때때로 정체불명의 경련이나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생선이라곤 먹어본 적도 없는 젖먹이 아기가 미나마타병일 거라고는 엄마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진단이 내려질 때까지, 시내 병원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고, 그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배며 어구들을 내다팔아야만 했다.”
이시무레 미치코의 <슬픈 미나마타>에서

생계 핍박 어민들 공장 난입

▲ 미나마타 햐쿠켄항에 자리한 칫소의 아세트알데히드 공장. 1959년도 모습

1959년 7월 구마모토 대학 의학부 연구반은 미나마타병은 미나마타만의 어패류에 의해 발생하는 신경계 질환이며 오염 독물로 수은이 주목된다고 발표하였다. 이같은 발표는 시라누이해 연안 전역의 어민들의 생활에 핍박을 불러왔다.

미나마타의 생선소매조합은 미나마타의 어민들이 잡은 생선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숨통이 조여드는 어민들은 대표를 선발하여 칫소 공장에 보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공장측은 구마모토 대학의 설을 부정하고 미나마타병과 공장폐수는 무관하다며 어민들은 물론 환자들도 무시하였다.

한편 이 해 9월 칫소 부속병원의 호소카와 원장은 공장 폐수를 고양이에게 직접 투여해 발병을 확인하였다. 이는 어민들 투쟁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11월 2일 시라누이해 연안어민 총궐기대회가 미나마타 역전에서 열린 것이다. 2000여명의 어민들이 조업 중지를 요구하며 행진을 벌인 뒤 공장 안으로 쳐들어갔다.

“어민들은 왼쪽 정문으로 끊임없이 밀고 들어갔다. 돌멩이를 주워들고 사무실로 보이는 곳의 창문을 향해 던졌다. 그것은 얼마나 웅장항 파괴음이었던가. 외침소리. 창문으로 뛰어든다. 창문 안쪽에서 의자가 내던져졌다. 책상도 내던져지고 그것을 들쳐메고 공장 배수구를 향해 내리꽂기도 했다.”
<슬픈 미나마타>에서

지역 주민 속이는 기업

어민들의 봉기를 막는 300여명의 경찰과 유혈충돌이 빚어졌다. 이같은 어민들의 투쟁으로 시라누이해 연안 36개 어협에 대해 어업보상 일시금 3천만엔, 재건을 위한 융자금 6천5백만엔을 주기로 결정되었다.

어업보상금 중 1천만엔은 어민들의 공장 ‘난입’으로 발생한 공장측의 피해보상금으로 반환토록 하였다.

한편 미나마타병 환자모임에 대해서는 사망자에 대해서는 조위금 32만엔, 성인 환자에게는 연간 10만엔, 미성년 환자에게는 연간 3만엔을 발병 시점으로 소급하여 지급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과거의 미나마타 공장의 폐수가 미나마타병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일정 추가보상 요구는 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교환했다.

1960년 들어 칫소 공장은 배수정화장치를 만들었다며 기자들까지 불러 준공식을 열었다. 이 때 공장의 한 간부가 정화조의 물을 컵으로 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화방식은 고형잔재물을 침전지에서 침전시키는 방식이었는데 위에 든 맑은 물을 내보낸다 해도 메틸수은은 수용성이어서 물에 녹은 유기 수은이 그대로 바다로 흘러든다는 사실을 공장측이 모를 리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초토화된 경제를 되살리기에 총력을 다하였다. 수많은 공장들이 세워지고 많은 공장에서 매연과 중금속이 함유든 폐수가 나왔으나 경제성장에만 급급한 일본은 이같은 오염물질들을 정화하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며 기업의 편만 들어주었다.

1968년에야 공해병 인정

1964년 혼슈섬 중부 서해안에 있는 니가타현의 나가노강 유역에서 제2의 미나마타병이 발생하였다. 이듬해 니가타대학 쓰바키 교수 등이 니가타현 위생부에 ‘원인불명의 수은중독 환자가 아가노강 하류 해안지구에 산발’하고 있다고 보고했으며 이로 인해 니가타 미나마타병으로 공식 확인됐다.

이에 니가타 미나마타병 환자의 가족들 13명이 수은을 배출한 ‘쇼와전공’을 상대로 니가타 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다.

이러는 동안 미나마타시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미나마타병이 발병하였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환자가 2950명이고 이 가운데 1천여명이 사망했으며 비공식적으로 환자수는 1만여명으로 추산되었다. 하지만 발병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영세민들이었고 미나마타 시의 5만 인구 가운데 1만여명이 칫소사에 의존하여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공장의 수은 방출을 중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 미나마타병 위령비. 매년 5월 1일 이곳에서 위령제가 열린다.

1953년 첫 환자가 발생한 후 15년 만인 1968년 5월 칫소 미나마타 공장은 아세트알데히드의 생산을 중지하였다. 이어 신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 노동조합은 미나마타병 환자의 투쟁에 아무것도 해오지 않았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한다는 ‘창피 선언’을 하였다.

이해 9월 26일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현 미나마타병은 신일본질소비료 미나마타 공장 아세트알데히드 초산 설비 내에서 생산된 메틸수은 화합물이 원인’이라고 공식 발표하여 이 병이 공해병임을 인정하였다.

1969년 환자가정 상조회 소속 회원 일부29세대 112명이 칫소에 대해 총액 6억 4천여만엔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구마모토 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1973년 3월에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져 칫소와의 교섭이 시작됐으며 이 해 1월에 제기한 2차 소송은 1987년 3월 30일 구마모토 지방법원에서 열린 미나마타병에 대한 3차공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와 국가와 지방정부의 책임이 인정되었다.

일본 대법원, “정부가 책임져야”

일본 정부는 미나마타병 환자들의 보산에 대해 인색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1973년 환경청은 미나마타병 환자 보상협정을 체결하면서 소위 ‘인정제도’를 도입하여 검사 결과 환자로 인정받은 2.950명에 대해서만 보상금을 지급하였으며 1977년에는 새로운 인정 기준을 만들어 감각 장애 증상 이외의 다른 증세까지 요구하여 약 8천여명의 환자들이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1980년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한 3차 소송이 제기되어  2004년 10월에는 미나마타병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이 대법원에서 내려졌다. 대법원은 정부의 인정 기준보다 광범위한 구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했고, 2009년에는 ‘미나마타병 피해자 구제법’을 발효시켜 새롭게 피해를 호소한 환자들을 모두 인정했다. 미나마타병 50주년을 맞는 2006년 4월 30일 미나마타병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희생자 314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1994년 5월 마사즈미 미나마타 시장이 미나마타병 희생자 위령제에서 처음으로 사죄했으며 2010년 5월 1일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미나마타시를 방문해 미나마타병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하토야마 총리는 “정부를 대표해 미나마타병 확대를 막지 못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한다”고 밝혔다.

한편 미나마타병 시라누이 환자회는 국가, 구마모토현, 가해기업인 칫소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며, 구마모토(熊本) 법원은 미나마타병 관련 소송에서 환자 1인당 210만엔을 지급하는 선에서 소송을 끝내자는 화해안을 정부에 제시했고, 정부와 소송원고 2천명은 지난 3월 화해안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지난 5월부터 보상을 시작했으며 보상 신청자는 소송자와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환자를 합해 3만명을 넘을 것으로 일본 정부는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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