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연재/김환영의 그림책 세계 (2)그림책 속의 시간
■ 기획 연재/김환영의 그림책 세계 (2)그림책 속의 시간
  • 김환영 시민기자
  • 승인 2017.08.30 15:26
  • 호수 8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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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우리 둘이 씩씩하게 사는 거야”
슬픔과 고통 극복하며 나타난 총천연색 꿈

▲ ▲<씩씩해요> (전미화, 사계절2010)표지
그림책은 대개 16바닥(16장의 펼침화면)으로 구성됩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16바닥 안에서 모두 소화하지요. 그러니까 16바닥은 한편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림책의 최소한의 그릇인 셈입니다.
그림책은 최소한의 그림과 글로 구성되기 때문에 ‘시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시에서 단어 하나에 토씨 하나까지 정치하게 갈고 다듬어 움직일 수 없게 하듯, 그림책도 꼭 그렇습니다. 그림책에서 불필요한 장면이나 문장이 한군데만 있어도 그 그림책은 훌륭한 그림책이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그림책은 꼭 필요한 자리에 꼭 필요한 만큼의 그림과 글이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 아빠의 교통사고 후 닥친 슬픔과 고통
전미화의 그림책 <씩씩해요>를 펼쳐봅니다. 샛노란 표지와 하늘색 면지가 산뜻합니다. 속표지를 열어 보니 째그만 아이가 혼자서 그네를 타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첫 장면을 열자 온통 빨강색 화면에 자동차 두 대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지요. 다음 장에는 아빠가 침대에 누워 있고, 아빠가 세상을 떠나자 엄마는 바빠집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타던 그네도 재미가 없고, 목욕도 혼자서 해야 합니다. 아이는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고 혼자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난 후 나타난 총천연색 꿈
그러다 한날, 꿈을 꾸지요. 색색의 아름다운 풍선이 가득한 꿈에서 예전처럼 가족이 동그랗게 모여 웃는 행복한 꿈입니다. 이 장면은 앞의 일곱 장면과는 다르게 색색깔 풍선이 화면에 가득합니다. 색색깔의 풍선들 사이로 아빠와 엄마 그리고 자신이 모여 있는 정말 ‘꿈같은’ 장면입니다. 특히 듬직한 아빠의 턱 밑에 작게 그려놓은 아이는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이는 오줌을 싼 거였고, 혼낼 줄 알았던 엄마는 뜻밖에도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말해주지요.
“괜찮아.”
그리고 엄마가 쉬는 날 아이와 함께 산에 갑니다. 엄마와 함께 간 산은, 아이가 꿈에서 본 풍선의 그것처럼 총천연색으로 눈앞에 펼쳐집니다. 산에서 엄마는 아이와 어깨동무를 한 채 손을 꼭 잡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둘이 씩씩하게 사는 거야. 알았지?”

그 뒤로 아이는 혼자 먹는 밥도 괜찮아지며, 설거지도 하고 엄마가 마시고 간 커피 잔도 치울 수 있게 됩니다. 아이는 혼자서도 그네를 타고 마침내 엄마는 운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엄마와 아이는 어려운 집안일들도 협동해서 할 수 있게 되지요. 거실에 걸려 있던 사진 속 아빠가 웃고, 아이도 아빠를 보면서 웃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온 아이는 화면 밖의 독자를 보며 밝게 말합니다. “나는 씩씩해요.”

이 그림책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화가가 만들어 낸 여백들은 홀로 된 외로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독자를 염두에 둔 배려이기도 합니다.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간단한 먹색 선묘로 인물과 배경을 처리함으로서 독자에게 상상과 공감을 위한 시간도 충분한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앞의 일곱 바닥은 세상이 온통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으로 물밀어오는 듯 한 가지 빛깔로만 그려져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슬픔과 고통의 감정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색조였던 화면은 그러나 아이의 꿈에 나타난 풍선과 아빠를 기점으로 총천연색 화면으로 바뀝니다. 이런 총천연색 꿈이 얼마만에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이는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예전처럼 아빠와 엄마의 품속에서 아이는 잠시라도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하여 집안 풍경은 비로소 본디의 색으로 돌아오고, 아이의 일상도 차츰 제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그림책이 진부하지 않은 까닭은 화가가 감정 선을 면밀히 분석하고 고려한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아빠를 잃은 가족의 상황은 전혀 씩씩할 수 없지만, 그림책 《씩씩해요》는 바로 이러한 장치들로 그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위로가 그런 것처럼 위로를 목표로 하는 그림책은 결코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물이나 화면구성이 단순해 얼핏 쉽게 만들어진 것만 같지만, 화가는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어린이와 어른이라는 ‘이중독자’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잃지 않으려 고투를 거듭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전미화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작가입니다. 자신만의 시선과 문법을 지니고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책들은 상실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책은 자칫 어두울 수 있는 감정들을 돌파해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납니다. 《씩씩해요》를 포함해 《미영이》,《너였구나》,《빗방울이 후두둑!》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림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용직노동자 가족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달려라 오토바이》는 심지어 경쾌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책은 체질적으로 ‘응달에서 피는 꽃’이란 생각이 듭니다.

책을 덮고 표지를 다시 봅니다. 책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성장 그림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맞다 싶습니다. 우리는 아픔과 고통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림책 《씩씩해요》는 교통사고 뿐 아니라 얼마든 다르게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갑자기 닥친 여러 불행들- 그것은 삼성 반도체공장의 백혈병 사건일 수도 가습기사건일 수도 있으며, 세월호사건이나 뜻하지 않은 가족이나 이웃, 친구의 죽음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씩씩해요》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시간은 모두 몇 날일까요? 갑자기 닥친 고통이나 불행에서 헤어나려면 우리는 어느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얼마 전 탄광마을 아이들이 쓴 시에 붙인 판화들로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보령이 무연탄을 생산하던 탄광지역이라 광부들과 광부가족들에게 그림들을 보여드리고 싶었지요. 하지만 전시장에서는 광부도 광부가족도 거의 만나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상처가 너무 깊으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볼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지요. 폐광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상처가 아물려면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거였고, 충분한 보상과 위로가 이루어지지 않는 그이들에게는 여전히 위로와 보상이 필요한 것이었고 명예회복 또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 마침내 ‘씩씩’해질 수 있을 때까지요. 그러니 그림책 속의 시간은 하루일 수도 있고, 일 년일 수도 평생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림책을 읽는 방식도 독자의 형편에 따라 다를 것이니 이 또한 그렇겠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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