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에 EBS에서 3부작 다큐멘터리 <여성백년사>를 방영했다. 1부작에서는 근대 최초의 여성 문인 김명순의 비극적인 삶을 조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신여성을 당시의 내로라하는 남성 문인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모함을 씌워가며 몰락시켰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결국 문학을 접고 조선 땅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다음 1950년대 초반 정신병원에서 숨졌을 거라는 추측만 떠도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문학 전집이 발간되는 등 새롭게 조명받고는 있으나, 김명순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당대 남성들의 파렴치한 모습은 낯이 뜨거울 정도다.
김명순에 이어 등장시킨 여성은 강향란이다. 김명순은 그래도 문학계 안에서일지언정 어느 정도 알려진 편이지만 강향란이라는 이름은 퍽 낯설게 다가온다. 진행자가 강향란을 소개하는 열쇳말은 단발랑인데, 이 낱말이 국어사전에 실려 있다.
단발랑(斷髮娘): 단발한 젊은 여자.
특정 부류의 여성을 지칭할 때 요즘은 뒤에 ‘녀’를 붙인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단발녀’로 검색해보면 꽤 많은 기사가 뜬다. 하지만 아직 ‘단발녀’라는 낱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단발랑은 1920~1930년대 무렵에 유행하던 말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 낱말이다.
동아일보는 1922년 6월 22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강향란(당시 22세)이라는 여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기사 제목이 ‘단발랑(斷髮娘)’이었다. 강향란을 단발랑이라 칭하게 된 건 당연히 머리를 짧게 깎았기 때문이고, 그 일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기에 신문에도 오르내리게 되었다.
강향란은 본래 한남권번에 속한 기생이었는데, 권번에 드나들던 청년문사와 연애를 하기 시작하면서 기생을 그만두었다. 그런 다음 배화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나 얼마 뒤에 남자로부터 버림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지 못한 강향란은 한강 철교에 올라 몸을 던지려 했으나, 다행히도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던 김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런 다음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밤새 통곡한 다음 굳은 결심을 한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강향란의 마음은 이랬다고 한다.
‘나도 사람이며 남자와 똑같이 살아갈 당당한 사람이다. 남자에게 의뢰를 하고 또는 남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이 근본으로부터 그릇된 일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자기가 자기를 알지 못한 곳에 있다. 나의 고통도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있다.’
그런 다음 광교에 있는 중국 이발관에 가서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깎았다. 그런 모습으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으나 머리 깎은 여자는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통보와 함께 퇴학을 당한다. 계속 공부하고 싶었던 강향란은 남자 양복을 입고 서대문 안에 있는 정칙(正則) 강습소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그곳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중국 상하이로 발길을 옮겼고, 그 후 부산에 있는 신문사의 기자를 거쳐 한때는 배우로 영화에도 출연했다. 한편으론 1928년 무렵부터 여성들의 사회운동 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여 사회활동가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근우회 활동을 끝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강향란이 머리를 자르자 여러 신문과 잡지에 여성들의 단발에 대한 기사와 찬반 논쟁이 실리기 시작했으며, 몇 해 지나지 않아 신여성들 사이에서 단발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어떤 일의 선구자가 겪는 고난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정도가 더욱 심했다. 강향란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