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59) / 홍백전(紅白戰)
■ 박일환의 낱말여행 (59) / 홍백전(紅白戰)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8.30 22:30
  • 호수 11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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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와 백기를 들고 싸운 일본의 두 가문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예전에는 초등학교마다 가을 운동회를 열었고, 전교생을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경기를 치르는 방식이라 흔히 청백전이라는 말로 불렀다. 선수들이 사력을 다하는 동안 관중석에서는 서로 자기편을 응원하느라 목이 쉴 정도로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를 외쳐대는 소리가 운동회의 열기를 더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고 운동회라는 말 대신 체육대회라는 말이 더 보편화됐다.

현기영 소설가가 제주 4.3을 배경으로 쓴 3권짜리 장편소설 제주도우다2권에 조천소학교에서 해방을 기념하는 운동회를 열 때 홍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면서 응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 청군과 백군이 아니고 홍군과 백군이었을까? 국어사전에 홍백전이라는 낱말이 나온다.

홍백전(紅白戰): <체육> 홍군과 백군으로 편을 갈라 겨루는 싸움.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인데,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는 운동 경기 따위에서라는 말이 더 들어 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말이라서 청백전 이전에는 홍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게 아닐까 싶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옛 신문 기사를 검색해 보았더니 역시나 홍백전이라는 말이 1920년대 초반부터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홍백전과 함께 홍백시합이라는 말도 함께 쓰였다. 반면 청백시합이라는 말이 1948109일 동아일보 기사에 보이고, 청백전이라는 말은 195034일 조선일보 기사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대부분의 일본어사전에 홍백시합(紅白試合)이 표제어에 있고, 드물지만 홍백전(紅白戰)이라는 표제어를 실은 곳도 있다. 홍백전이라고 할 때 많은 이들이 일본 NHK 방송국에서 해마다 연말에 진행하는 홍백가합전이라는 가요 프로그램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일본에서도 청백전이라는 말이 드물게 쓰이긴 하지만 일본어사전에 올라 있는 낱말은 아니다.

일본에서 두 팀으로 나누어 시합할 때 왜 홍군과 백군으로 구분하기 시작했을까? 일본 역사에서는 대략 11세기 말부터 12세기 말까지를 흔히 겐페이 시대(源平時代)라 부른다. 겐지(源氏) 가문과 헤이시(平氏) 가문이 대립하던 시기인데, 두 가문이 전쟁을 벌일 때 겐지 가문은 백기(白旗)를 헤이시 가문은 홍기(紅旗)를 들고 싸웠다고 한다. 이로부터 운동 경기를 할 때 홍기와 백기를 들고 싸우는 홍백시합이 유래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우리가 홍백시합이나 홍백전이라는 말을 쓰게 된 건 당연히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겐페이 시대가 불러온 것으로 운동회 방식 말고 하나 더 있다. 당구 시합을 할 때 팀을 짜서 하는 걸 흔히 겐페이라고 한다. 이 용어가 바로 겐페이 시대의 두 가문을 뜻하는 源平을 일본 음으로 읽은 것이다.

홍백전이 청백전으로 바뀐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하나는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라는 것일 테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홍백전이라는 말은 한국 땅에서 아예 사라졌을까? 그렇지는 않다. 야구를 비롯한 몇몇 운동 종목에서 정규 리그 이전에 전력을 점검하기 위해 같은 구단 선수끼리 팀을 나누어 치르는 연습경기를 홍백전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모든 구단이 그러는 건 아니고 청백전이라는 용어를 쓰는 구단도 있다. 홍백전이라는 말을 쓰는 구단은 대체로 팀 로고 색깔이 붉은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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