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임금 눈에 띄어 영릉참봉 관직 진출 계기
※서천이 낳은 당대 최고의 시인 석북 신광수는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뒤늦게야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그의 관직진출 계기가 광대 원창과의 아름다운 인연이었음을 밝히는 글을 신웅순교수가 보내왔습니다.
석북은 1750년 (영조 26년), 39세의 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했다. 예로부터 과거에 급제하면 어사화를 꽂고 소리꾼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며 삼일유가를 행했다. 석북도 전통에 따라 친지와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문희연을 베풀었다. 석북의 고향인 숭문동이다. 숭문동은 문을 숭상한다는 마을로 지금의 화양면 대등리를 말한다. 여기에서 석북과 광대 원창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원창은 장중한 우조로 단가를 불렀다. 영산은 단가를 말한다. 단가는 판소리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짧은 노래이다. 지금의 단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곡목을 지칭하지 않아 판소리 같은 어떤 창곡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대 원창의 판소리는 독보적이었다.
때는 꽃이 지는 춘절이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유가를 끝내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쉬운지 앵콜쏭을 불러달라 한다. 원창은 단가가 아닌 춘면곡으로 유종의 미를 장식했다.
춘면을 느짓 깨어 죽창을 반개하니
정화는 작작헌데 가는 나비를 머무는 듯
안류는 의의하여 성긴 내를 띄웠세라
창전의 덜 괸 술을 이삼배 먹은 후에 호탕하여 미친 흥을
…후략…
춘면곡은 12가사 중 하나로 야유랑과 미희와의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가사이다.
봄날 졸음 느긋이 깨어 대살창문 반쯤 여니 뜰에 핀 꽃이 화려하고 가는 나비 머무는 듯. 강언덕 버들은 무성하여 옅은 안개가 끼었어라. 창문 앞 덜 익은 술을 두 세 잔 먹은 후에 호탕하여 미친 흥을…후략…
춘면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봄잠에서 깨어나 술을 마시고 야유원으로 갔다. 미희를 만나 정을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움에 마음이 아파 입신양명을 해 그녀를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이다. 춘면곡은 달리 여성이 아닌 남자의 상사의 정한을 노래한 가사이다. 창법이 가곡ㆍ시조와 비슷하며 가성과 요성을 사용, 서도 소리 창법으로 부르는 애련한 곡이다.
원창은 아쉬운 이별을 마무리하고 싶어 이 노래를 불렀을까. 이제 원창은 돌아가야 했다.
석북은 가난했다. 원창에게 출연료를 지급해줄 여유가 없었다. 어색하게 축하연이 끝나는가. 원창은 얼마간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때 석북은 기지를 발휘, 묘안을 생각해냈다. 출연료 대신 도홍선에 일필휘지, 시 한 수를 원창에게 써 주었다. 석북은 이미 관산융마로 당대를 풍미했던 불세출의 시인이었다.
원창은 돈 몇 푼보다 그 유명한 석북 선생으로부터 소리값으로 받은 도홍선 부채가 더 없이 기쁘고 소중했다. 원창은 귀한 보물로 여기며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돌아갔다.
이 때 부채에 써준 시가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석북문집』권 4에 수록된「제원창선(題遠昌扇)」이다.
붉은 부채는 한삼 소매 툭 쳐 날리고 도홍선타한삼비 桃紅扇打汗衫飛
우조 영산은 당세 독보적이라네 우조영산당세희 羽調靈山當世稀
헤어질 무렵 춘면곡 다시 한 곡조 부르고 임별춘면경일곡 臨別春眠更一曲
꽃 지는 시절에 강을 건너 돌아가네 낙화시절도강귀 洛花時節渡江歸
붉은 부채는 한 삼 소매를 툭 쳐 날리고 우조 단가는 그대가 당세에 독보적이라네. 헤어질 무렵에 춘면곡을 다시 부르고 꽃이 지는 시절에 강 건너 돌아가네.
석북은 이렇게 작별의 아쉬움을 시와 함께 정성껏 부채에 담아 원창을 전송했다.
그즈음에 지은 또 하나의 작품「마상희술행자음(馬上戱述行者言)」이 있다. 당시 석북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시이다.
복사꽃은 취한 듯 버들은 조는 듯 桃花如醉柳如眠
봄바람에 쌍적의 소리 말 앞에서 불어대네 雙笛春風出馬前
서른 아홉 살이나 먹은 신진사 보고 三十九年申進仕
행인들은 되려 ‘신선이라’ 부러워하네 行人却說是神仙
20대에 이미 했을 진사 급제이다. 그런데 겨우 서른 아홉에 급제했다. 사실 아들의 진사 급제보다 늦었다. 대과 급제자처럼 쌍피리를 말 앞에서 불어내니 복사꽃은 취해있고 버들은 조는 듯하다. 멋적은데 사람들은 나를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부러워하고 있으니 좀 창피하다는 얘기이다. 석북의 이면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원창선(題遠昌扇)」의 시 구절은 19세기 후반 명창 장자백의「춘향가」중 농부에 “됴홍션터한션비한이 우죠영산졀승이난”이 있고 박봉술의 농부가에도 “도홍선산타한삼비요. 우조영산 정승키는”이 삽입되어 있다. 조선 후기 문희연을 통해 문인들에게 판소리가 소개 되면서 이렇게 판소리 사설이 양반 향유층이 고려한 방향으로 삽입, 첨삭되기도 했다. 당시 석북시의 위세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끼친 한시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판소리, 민요, 잡가 등은 서민음악이요 가곡, 가사, 시조 등은 선비음악이라고 한다. 판소리 광대인 원창이 정가인 가사도 자연스럽게 함께 불렀다는 것은 18세기 음악의 지형도를 다른 시각으로 분석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가 아닌가 생각된다.
원창이 노비 신분이었다는 호적부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이다.
판소리 광대 원창은 노비신분이었다. 영암군 종면 무덕정리에 사는 남평문씨 문재주 의 소유 노비로 외지에서 주인의 토지 재산을 관리하는 외거노비였다. 외거 노비는 생 활에 자유로웠다. 이로 인하여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문재주의 호적부를 보면 모친도 노비로 이름은 취매이다. 5번째 낳은 노비가 바로 원 창(1695년생)이다. 당시의 거주지는 경상도 남해였으며 석북 고향에서 축하공연 당시 나이는 55세였다.(박수환의「석북 신광수 4남매 등 8문장을 배출한 숭문동이야기」, 「서해신문」)
이름은 같으나 석북이 만난 그 원창인지는 호적부 노비의 원창과 훗날 광대 원창과의 중간 연결 고리가 있어야할 것 같아 또 다른 기록을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소리꾼 광대 원창은 가는 곳 마다 그 유명한 석북의 시가 적힌 합죽선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 바람에 원창은 광대로서 명성과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소리와 판소리 창자에 대한 위상이 급부상할 때였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박남, 원창 등이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원창은 어느날 임금님을 알현하게 되었다.
원창은 내원에 들어가 전하 앞에서 한바탕 타령을 했다. 합죽선을 접었다 폈다하며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렀다.
왕은 광대에게 물었다.
“부채에 쓰여있는 거뭇거뭇 글씨가 무엇이더냐?”
“석북 신광수의 시이옵니다.”
“아니, 관산융마로 이름을 떨친 시인이 아니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어찌 살고 있는가.”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어떤 직책도 갖고 있지 않나이다.”
원창은 그 때 출연료를 주지 못했던 청빈했던 석북의 삼일유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왕은 신광수에게 벼슬을 내렸다. 부채 하나가 무엇이길래 벼슬까지 가는 인연이 이렇게 이어졌을까. 참으로 묘한 것이 사람의 인연이다.
조재삼의 『송남잡지』의 기록이다.
광대가 내원에 들어가 타령을 하는데 왕이 부채를 가져다 보고는 즉시 신광수에게 첫 벼슬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석북의 첫 벼슬은 영릉 참봉이었다. 영조 37년 1761년 석북의 나이 50살이었다.
석북은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그동안 벼슬이 없어 내내 호구를 면치 못했다. 참봉 벼슬은 종9품 최하위직 관직이었다. 그나마 식속들에게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늘그막의 나이에 장자로써 얼마나 뿌듯하고 마음이 설레었을까.
석북은 집안 살림을 아우에게 맡긴 채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고향을 떠났다.
떠나면서「문제명 聞除命(제수하는 명령을 듣다」이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시문으로 반세상 이름 헛되이 전했는데 詞賦虛傳半世名
밝은 때 임금 명령 시골 사람 놀라네 明時一命野人驚
일찍이 고관에게 편지 올릴 생각 한 적 없었으나 會無光範投書意
진실로 여강의 사령장을 받들 마음이 있었네 實有廬江奉激情
물난간 의지해 새와 고기 불러 이별하고 水檻憑呼魚鳥別
산농토 남아 아우들이 농사짓네 山田留與弟兒耕
원릉에 예의 갖추어 신하 직분 받드니 園陵○掃恭臣職
아침에 부모님께 하직 인사하고 북쪽으로 떠나네 朝日辭親便北行
석북은 여기에서 문인들과 수창한 득의작이라 할만한「여강록」을 후세에 남겼다.
200년 하고도 반세기가가 훨씬 지난 지금이다.
판소리 5대 명창 중 이동백ㆍ김창룡 선생이 태어난 곳이 또한 서천군이다. 판소리 중고제의 원조라 할 만한 곳이다. 2023년 ‘제2회 중고제 판소리 축제’가 열렸다. 11월 21일에는 한국판소리학회 주최 ‘중고제 판소리의 가치와 활용’이라는 주제로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튿날 석북 신광수의 묘역에서 판소리 학회의 후속 행사로 석북의 문희연 퍼포먼스가 있었다. 학회 회장인 최혜진 교수로부터 석북의 당시 모습을 시인이자 서예가인 신웅순 교수에게 재현해 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필자는 석북 신광수의 8대 후손이다. 필자가 석북 선조를 대신해 판소리를 부른 창자에게 직접 부채에 붓으로 시를 써서 증정했다. 이어 향토 학자인 박수환 선생의 석북과 원창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명창 구보경이 묘소 앞에서 우조 시조 ‘나비야 청산 가자’를 불렀다.
석북의「관서악부 15」에 “일반 시조에다 장단 가락을 붙인 이는 바로 장안에서 온 이세춘이 아니런가”라는 시구가 있다. 석북은 거기에 시조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알렸다. 석북 묘소 옆에는 시조명칭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그 앞에서 시조창을 불렀으니 가신지 이백년하고도 오십년이 훨씬 넘은 때이다. 명창이 부른 청아한 우조 시조는 석북 선생이 계신 저승에까지 들렸으리라.
비약일지 모르나 시조창 역시 석북의 고향이 서천이니 문화재 중고제 판소리 문화와 함께 또한 문화재급 시조 문화를 널리 국내외에 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하늘에 닿을 듯 간절했다.
감회가 깊었다. 그날은 봄이었으나 퍼포먼스는 청명한 가을이었다.
※도움을 주신 최혜진 교수님, 향토사학자 박수환 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