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 (79)용경(龍耕)
■ 박일환의 낱말여행 / (79)용경(龍耕)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4.02.08 08:36
  • 호수 11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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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깨고 나오는 용?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한겨레신문의 이문영 기자가 김해자 시인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다 용이 밭을 갈며 승천했다(용경·龍耕)는 마을에서 시인은 언니들에게 배운 호미질과 낫질로 지난 시간을 갈아엎었다.”라는 구절을 만났다. 김해자 시인은 천안시 광덕면에 있는 용경마을에서 이웃 할매들과 함께 호미질을 하며 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용경 산신제를 지낸다는데, 용이 밭을 갈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모양이다. 전설을 가지고 그게 사실이니 아니니 따질 건 없다.

용경이라는 낱말이 고려대한국어대자전에 나온다.

용경(龍耕): <민속> 동지(冬至) 전후에, 얼음이 언 모양을 보고 다음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일.

한자에 분명 용()이 들어가 있는데 어쩐 일인지 풀이에는 용과 관련한 내용이 없다. 이래 가지고는 저 낱말이 생겨난 까닭을 알 도리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용경 대신 용경룡이라는 낱말이 실려 있다.

용경룡(龍耕龍): <민속> 한 해의 풍흉(豐凶)을 알아보는 점의 하나. 동지를 전후하여 함창의 공검지, 밀양의 남지, 당진의 합덕지, 연안의 남대지에 언 얼음의 모양이 남에서 북으로 갈라지면 풍년, 서에서 북으로 갈라지면 흉년, 동서남북으로 갈라지면 풍년도 흉년도 아니라고 한다.

풀이가 꽤 자세한 편이지만 아쉽게도 오류가 보인다. ‘서에서 북으로서에서 동으로라고 해야 말이 된다. 더 큰 문제는 용경룡이라는 용어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민속대백과사전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풀이로 보아서는 용경에 관한 게 분명한데 대체 어느 자료에서 용경룡을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용이 알면 화를 낼 만큼 커다란 실수임이 분명하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용경 풀이 역시 아쉬운 대목이 있다. ‘얼음이 언 모양이아니라 얼음이 갈라지는 모양이라고 했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용경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나오는데, 아래는 태종 8년의 기록이다.

연안부(延安府)의 남지(南池)에 신룡(神龍)이 있는데,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매년 겨울에 얼음이 터지는 것을 용경(龍耕)이라고 하는데, 물 근원부터 하류(下流)까지 곧게 터지면 그것은 홍수가 날 것을 점치는 것이고, 못 가운데를 가로 끊어서 얼음과 흙이 서로 섞이면 그것은 풍년을 점치는 것이고, 만일 전혀 터지지 않으면 그 점은 흉년인데, 올겨울에 터진 것은 풍년의 조짐이라.’고 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와 비교하면 얼음이 갈라지는 방향에 따른 풍흉의 결과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데,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의 기록에 용경을 용갈이라고 번역한 게 눈에 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용경 대신 용갈이가 표제어에 있으며, ‘용이 밭을 간 것과 같다는 뜻으로, 얼음이 녹을 무렵에 두꺼운 얼음판이 갈라져 생긴 금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갈라진 금을 가지고 풍흉을 점쳤다는 내용이 없어 역시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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