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선거를 앞두고 월남 선생을 기리며
사설 / 선거를 앞두고 월남 선생을 기리며
  • 뉴스서천
  • 승인 2024.03.27 18:42
  • 호수 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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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310일 오후 2. 서울 종로에는 1만여 인파가 몰려들었다.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회장에는 청장년들이 갓을 쓰고, 혹 장죽을 물고 두루마기를 걸친 모습으로 발 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7만 명이었다 하니 이 대회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장안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유례가 없었다.

독립협회에서 주최·주관하고 이상재 선생이 사회를 본 이 대회에서 외세의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는 연설이 주종을 이루었다.

만민공동회는 계속 이어졌다. 초기에는 참여한 사람들이 주로 지식인과 소상인들이었으나 점점 확대되어 학생, 교원, 종교인, 하층민까지 참여했다.

민중의 힘을 등에 업은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애국적 지식인들의 상소는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18981012일 박정양·민영환의 개혁파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월남 선생은 백성들의 권리를 왕권의 상위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또 관료는 임금의 신하인 동시에 백성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만민공동회의 주도세력은 신정부와의 협의하에 중추원을 개편해 의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뒤 의회 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개혁파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15일 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고 중추원 신관제(中樞院新官制 : 의회설립법)를 공포했다. 승세를 탄 만민공동회는 18981028일에서 11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대집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서울시민은 물론 독립협회, 국민협회, 일진회 그리고 정부 대표로 의정부 참정 박정양 등 10여명의 정부 대신들이 참석하여 관민공동회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파 정부는 의회 설립 하루 전인 114일 밤에 붕괴되었다. 의회가 설립되어 개혁파 정부와 연합하면 영원히 정권에서 배제되는 것이라고 판단한 수구파는 독립협회 등이 의회를 설립하려는 것은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무대신 등으로 한 공화정(共和政)으로 국체(國體)를 바꾸려는 것이라는 내용의 익명서(匿名書 : 비밀전단)를 뿌린 것이다.

이에 고종은 자신이 폐위된다는 모략 보고에 놀라 11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의회 설립령을 취소했다.

돌아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이다. 월남 선생이 꿈꾸었던 의회민주주의의 첫발을 당시에 디뎠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22대 총선을 앞둔 29일 월남 선생 생가지인 한산 종지리 일원에서 월남 선생 97주기 추모제가 열린다. 월남 선생의 당시 일을 생각하면 다가오는 선거에서 나의 한 표는 나라의 주인으로서 얼마나 소중한 주권 행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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