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서 느끼는 유
무에서 느끼는 유
  • 공금란 기자
  • 승인 2005.02.18 00:00
  • 호수 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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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예백일장 산문 - 참방
이영선 / 서천여자고등학교 1학년
법정 스님의 책 중에서 「무소유」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진정한 소유란 무소유이다.”라고 나오는데,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텅 빈 겨울 들녘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야말로 텅 빈 겨울 들녘이 새파란 겨울 하늘을 안고서 펼쳐져 있었다. 언제나 보았던 겨울 들녘이었는데, 그 때는 뭔가 달라 보였다. 추수도 다 끝나서 그냥 아무 것도 없는 ‘땅’ 그 자체였지만 나는 거기서 뭔가 꽉 차 있는 것을 느꼈다. 겨울 들녘에 꽉 차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땅’은 봄에는 새싹이 나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든 꽃을 피우기 위해서든 씨가 뿌려진다. 여름에는 부드럽던 새싹이 마치 사춘기를 넘긴 사내아이처럼 쑥쑥 커서 새파란 젊음을 뽐낸다. 가을에는 황혼기를 접어들은 중년처럼 무게 있고 분위기가 넘치며, 마지막 투혼을 발휘해서 들판을 온통 금빛으로 물들인다. 이렇게 화려한 봄, 여름, 가을의 들녘과는 달리, 겨울의 들녘은 황폐하고, 텅 비어있다.

하지만 나는 사계절의 땅 중에서 겨울의 땅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봄의 땅의 신선함과 여름의 땅의 싱싱함과 가을 땅의 풍성함도 큰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치 있는 땅들도 겨울의 긴 휴식과 준비기간이 없다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땅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옷이나 난로 같은 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다음에 있을 생산을 위하여 차가운 눈과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는 겨울의 땅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땅이 있는 것이다.

장독도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미래를 위해 꿋꿋하게 버티는 겨울의 들녘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아름다움은 봄, 여름, 가을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들녘에서 느낀 꽉 차 있던 것은 바로 내면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무조건 화려하고 겉으로만 드러나는 아름다움만 쫓는 우리들의 두 눈은 과연 겨울 들녘과 같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이미 내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이미 내면의 아름다움 같은 건 안 보이게 된 것이 아닐까?

무심코 지나쳤던 겨울 들녘에서 이렇게 크나큰 아름다움을 느낀 것이 바로 무소유의 의미가 아닐까? 물론 내가 그 것을 소유한 것도 아니고 소유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무에서 유를 느낀 건 겨울 들녘이나 무소유와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무소유라는 말의 정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에서야 그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무소유의 의미를 이해했고, 누군가가 나처럼 내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다.

이제 유에서 유를 느끼는 것만 아니라, 무에서도 유를 느낄 수 있도록 겉모습의 아름다움만 중시하는 눈을 버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가져야겠다. 나 자신도 겨울 들녘과 같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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