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갯바닥 뒷갯바닥’ 해산물이 지천이었다”
“‘앞갯바닥 뒷갯바닥’ 해산물이 지천이었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1.04.11 11:27
  • 호수 5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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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 소부사리 정구윤씨

“바다 얘기만 나오면 속이 뒤집어집니다”
부사방조제로 물길이 막히기 이전 바다 얘기 좀 들려달라는 요청에 정구윤(61, 서면 소부사리)씨는 이렇게 얘기를 시작했다.


“1986년에 부사방조제를 막으며 간척사업이 시작됐는데 방조제 수문 자리에 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랑캐가 왔다고 해서 ‘백이(白夷)’라 불렀는데 그 산을 다 헐어 개를 막았습니다. 백이 안쪽을 앞갯바닥, 그 너머를 뒷갯바닥이라 불렀습니다.”


웅천천 본류와 부사리 당산에서 내려가는 갯골과 보령 쪽에서 내려오는 갯골이 합쳐지는데 물때가 되어 뻘이 드러나면 앞갯바닥은 말 그대로 ‘뻘 반 조개 반’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조개란 대합, 백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갯바닥은 종패의 생산지였습니다.”


파내도 파내도 이들 조개가 성장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해양연구원 제종길 박사에 따르면 서해 바다 전체를 놓고 볼 때 거의 유일하게 충청도 연안지역이 모래로 되어있다는 설명이다. 오랜 세월 동안 금강과 웅천천, 대천 등이 가져다 부린 모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래가 섞인 모래펄 갯벌은 여러 어족 자원의 산란지로 최적이었다.


“큰 농어가 이곳에 와서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치면 그놈을 새끼에 매달아 끌고 왔습니다.”
굴, 낙지, 주꾸미, 꽃게 등이 철철이 지천이었다.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농사를 짓는 데에는 종자값, 비료, 농약을 쳐야 하고 1년에 한번밖에 수확을 못하지만 호미나 그레(백합 채취기구)를 들고 매일 갯벌에 나가 채취하였다. 맛살을 두 식구가 한번 나가면 100kg 이상을 잡아 지게에 지고 왔다. 밤에도 횃불을 들고 나가 꽃게를 잡았고 갈바탕에서는 깔똥게(방게)를 잡았다. 바위 틈 어디라도 손을 넣으면 뱀장어가 잡혔다.


뒷갯바닥에서는 대나무 살을 엮은 어살을 놓았는데 갈치가 하도 많이 걸려 그 무게를 못이긴 어살이 떠밀려 내려갈 정도였다. 정씨의 형님이 어살에 걸린 갈치를 끌고 물 속을 빠져 나오다 목숨을 잃을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앞갯바닥에서는 자연산 김을 채취하였다. 색깔이 붉어 홍태라 부르는 김을 1년에 3번 채취하는데 일반 양식 김보다 5배 정도 값이 더 나갔다. 


1965년 동백정을 방문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비인반도를 보고 “천국이 따로 없다”고 했단다.
부사리 마을 뒷산에 올라 바라보는 바다는 경치 또한 절경이어서 시인묵객이 아니라도 시 한수 읊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고 한다. 정구윤씨는 어느 할아버지가 읊은 시 한 수를 들려주었다. 부사리에서 꽤 유명하게 전해오는 시란다.


갈매기는 깨옥깨옥
바닷물은 철썩철썩
어~ 경치 조오타

방조제로 물때가 사라지자 보상금 한푼 받지 못한 주민들은 당장 생계가 막막했다. 간척지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올해로 11년째이니 10년 이상 아무 벌이가 없이 살아가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나기 시작했고 대부사리, 소부사리 합쳐 200여호 되던 마을은 이제 50여호나 될까. 좌절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다 농약을 마셨다. 방조제 막힌 이후 14명이 자살을 했다고 전한다.


정씨는 이러한 지경을 대통령에게 호소하기 위해 청와대를 찾아갔지만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정문에서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한다. 노태우 대통령 때였다. 아이들 학교보내지 말기 운동도 시도해보았으나 엄혹한 군부 독재 치하에서 그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쉽게 나서지 않았다.


“오늘 한 얘기는 맛뵈기에 불과 합니다. 평생을 부사리에서 살아왔는데 어찌 한번에 얘기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정씨는 농토 만여평을 임대하여 벼농사를 짓고 있다. 서천군 땅인데 보령시에 임대료를 내는 것도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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