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포청천’의 이름은 한국에서도 어느 성인 못지않게 익숙하다. TV 드라마를 통해 사랑받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수입되지만 ‘판관 포청천’이 유난히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인물(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로움, 공정함, 정확 정밀하고 엄격함, 단호함, 성실함. 판관 포청천에게서 읽을 수 있는 가치들이다. 그는 말로만 정의를 내세우지 않고 그것이 실천되도록 자신이 가진 수령으로서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말로만 공정을 내세우지 않고 부자가 가난한 자, 신분이 높거나 낮은 자, 남자나 여자, 나이가 많거나 어린 자, 그 사이에 편견이나 차별을 두지 않고 똑같은 잣대를 엄격히 적용하여 처벌할 것은 처벌하고 구제할 것은 구제하는 원칙을 실천했다. 아무리 강력한 귀족의 배후를 내세워도 굴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정확히 따졌으며, 힘이 없어 억울하게 당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의 이름은 포문정(包文正)이고 북송시대 합비(合肥; 허베이) 사람이다. 999년부터 1062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피부가 검어 ‘포흑자’ ‘포흑탄’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대중이 가장 즐겨 부른 애칭은 ‘포청천(包靑天)’이다.
그는 28세에 진사시험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여러 지방의 현령 지사 등을 지내고 어사 낭중 승지 추밀부사 등 중앙의 요직도 두루 거친 실력자였다. 중앙 정치라는 게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으면 시기 질투가 따르고 조금만 허술하면 언제인지 모르게 공격을 받아 부침을 겪게 마련인데, 포청천의 경우는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기에 함부로 공격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청천(靑天)’이란 명칭은 관직명이 아니다. ‘청천하늘’처럼 맑고 투명하고 자애로워,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우러를만한 인물이란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 아닌가 싶다. ‘청천’이란 별칭은 그 전에도 종종 청렴하고 엄격한 판관들에게 붙여졌던 것 같다.
그보다 1천5백년 먼저 살았던 춘추시대 유학의 비조 공자(孔子)는 50대에 노나라에서 잠시 관직을 맡은 적이 있다. 쉰 살 넘어 한 지방의 수령으로 발령을 받은 후 여기서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얻게 되자 곧 나라의 대사구로 영전하여 국정을 도맡았다.
공자는 옛 제도를 본받아 관청의 정당(正堂) 앞에 세 그루 홰나무를 심었다. 재판이 열릴 때면 당 위에 재판관의 자리를 마련한 후 홰나무 아래 각각 열 명의 장로와 사인 서민, 그리고 원고와 피고의 친척친지들을 분류하여 앉게 하였다. 이쪽 말도 듣고 저쪽 말도 들으며, 중간에서 객관적으로 판단에 관여할 배심원단까지 참여하게 한 것이다. 이들 각각의 주장과 변명과 참고진술 등을 다 들은 후에야 심판을 내리는데, 사건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한 번에 판결을 내렸으되 그 결과에 불복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사람들은 공자를 ‘공청천(孔靑天)’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 나라의 법질서와 윤리도덕은 그 시대에 힘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여하에 따라 바로 가기도 하고 기울거나 휘청대기도 한다. 나라의 법이 줏대없이 휘청거리거나, ‘유전무죄 무전유죄’하거나, ‘이얼령비얼령’이거나, 어질지도 의롭지도 바르지도 지혜롭지도 않게 망나니 칼처럼 함부로 춤을 출 때, 백성들은 마음으로부터 법에 승복하고 존중할 의지를 점점 잃게 된다. 그래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되겠는가. 정치권력이 법을 남용(濫用)하고 난용(亂用)할수록, 백성들은 옛 포청천이나 공청천의 전설을 그리워하게 된다. 현실이 그런 지경에 이른다면 높은 자리에서 법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직급만 높이 앉았다고 군자(君子)라 불리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