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혁명가 월남 이상재 선생
사설 / 혁명가 월남 이상재 선생
  • 뉴스서천
  • 승인 2025.03.26 13:03
  • 호수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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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9일은 한산면 종지리 월남 선생 생가지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 98주기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좌우합작의 신간회 초대 회장으로서 일제의 압제를 끝장내려 했던 영원한 혁명가였다.

청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한 이후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 및 제국주의 침략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난세에 서천이 낳은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이 땅의 민중이 주체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 근대화를 수립하려는 데 신명을 다바쳤다.

그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실현코자 했다.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애국적 지식인들의 활동은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고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 : 의회설립법)를 공포토록 하는 데 성공했으나 고종은 자신이 폐위된다는 모략 보고에 놀라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의회 설립령을 취소했다.

개벽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생은 신민회를 결성해 민주공화정을 추구했다. 이러한 신민회의 활동은 훗날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국체를 민주공화정으로 하는 데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07615일부터 1018일까지 약 4개월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은 특사를 보내 세계 각국에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해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대로 우리 대표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특사들의 혁혁한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실정을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우당 이회영과 함께 주도했던 고종황제 망명 기도 사건은 일제의 고종 독살로 이어져 3.1운동을 촉발시켰다.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며 이 땅에도 영향을 미쳐 1927년 좌우 합작의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된 월남 선생의 역할이 컸다. 이처럼 월남 선생의 일생은 사회 변혁 운동을 위해 바친 혁명가의 삶이었다.

월남 선생의 진면목을 찾아내고 그의 정신을 기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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