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동안 함석과 살아온 정규승 함석장인
반세기 동안 함석과 살아온 정규승 함석장인
  • 고종만 기자
  • 승인 2020.09.16 13:26
  • 호수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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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생활용품 가득한 ‘정함석’
▲정규승 함석장인이 가게 앞에서 이발소에서 사용하던 물조리개와 비누곽을 들고 서 있다.
▲정규승 함석장인이 가게 앞에서 이발소에서 사용하던 물조리개와 비누곽을 들고 서 있다.

함석 장인 정규승, 그의 가게인 정함석은 한산초등학교 운동장 건너편 철물점 옆에 있다.

그의 2~3평 남짓한 삶의 터전에는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함석으로 만들어진 생활용품과 공예품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함석으로 만든 생활용품을 사용했거나 접한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가게 입구에는 그가 만든 앙증맞은 물조리개가 아크릴 상자에 담겨 우체통 위에 놓여 있고, 반대편에는 기자가 어린 시절 진다리 석유 집에서 대병으로 석유를 사러갈 때마다 봤던 대형 주유용 자바라가 걸려 있다.

가게 내부 시렁에는 플라스틱과 고무가 등장하기 전 까지 우리네 부모님들이 사용했던 생활용품이 빼곡히 걸려 있다. 갈꽃비 단짝인 쓰레받이를 비롯해 불조심이 쓰인 석유등잔 받침대, 크고 작은 대야, 그름을 담던 깔때기, 농사용 물통, 이발소에서 사용하던 비누 곽과 물조리 등이 놓여 있다. 멋드러진 풍향계도 있었다.

그에게 함석일을 시작한 계기를 물어봤다.

“2급 장애자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18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함석기술을 배워 내려온큰형님 따라 하나둘씩 만들어보고 장에 내다 판 것이 평생 직업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한산장, 부여 양화장, 길산장, 서천장을 돌며 만들어놓은 생활용품도 팔았지만 아낙네들이 맡긴 밑 빠진 양동이, 물이 새는 대야 등을 수선해 일감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솜씨와 일감에 비해 수입은 배고픔을 면할 정도였다고 한다.

비 장애인인 다른 함석쟁이들은 70년대 지붕개량 붐이 일면서 지붕개량 일을 하면서 수입이 좋았던 것 같은데 나는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수선해주는 일만으로는 처자식 굶기지 않고 먹일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함석쟁이가 한산에 자신을 포함해 이한규, 안학수씨 등 3명 외에도 서천읍과 비인면 등 모두 6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장도막(5일장)에 만들어놓은 것 팔고 수선해준 대가로 보리 한말 팔아다 먹고 살았다면서도 장애인으로 막막했던 10대 후반 내가 함석 일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남매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켜 시집장가 보냈으면 성공한 인생 아니냐고 물었다.

자식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지 묻자 함석쟁이 해서 뭔 돈이 된다고...,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못하는 것인데 생각없더라구. 나 역시 자식에게 가난 대물림 할 생각도 없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자식에게는 대물림 하지 못했지만 정규승씨 막내 동생이 서천읍에서 정함석이란 간판을 달고 함석 등 지붕개량 일을 하고 있다.

가게 한편에 새끼틀에 사용하는 깔때기 1(2)가 있었다. 70년대 마대포대가 가마니를 대체하기 전까지만 해도 추수가 끝난 이후 이듬해 3월까지 농한기 주 수입원이 가마니였다. 집집마다 가마니 짜고 새끼 꼬는 일에 온 가족이 다 매달려야 했다. 기자 역시 당시 학교 갔다 집에 돌아오면 새끼틀에 올라 가마니용 새끼와 가마니 양 옆을 마감하는 굵은 새끼줄을 꼬아야 했다.

요것은 며칠 전 전라도 진도에서 체험 학습한다고 해서 2벌 만들 때 여벌로 더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솜씨 좋다고 소개했다면서 주문제작한 물건을 받아보고 연방 이사람 저사람 소개해서 간간히 물건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작업용 망치로 함석을 다루고 있는 정규승 함석 장인
▲작업용 망치로 함석을 다루고 있는 정규승 함석 장인

단골손님 중 몇 년 전 작고한 성공회대 강준혁 교수를 잊을 수 없다는 정규승 장인은 강 교수님이 살아계실때만 해도 매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게를 찾곤 했는데 그때마다 만들어놓은 물건이 다 팔리면서 원하는 제품을 구하지 못한 손님들이 많았을 정도로 겁도 안 나게 팔렸다고 했다, 강준혁 교수의 사망과 함께 정규승 장인의 수입도 줄었다. 올해는 코로나 19가 터지면서 서천군이 매년 6월 초 여는 한산모시문화제를 취소하면서 이따금씩 팔렸던 함석 제품도 팔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의 대체수입원은 분무기 판매 및 수리이다. “한해 농사가 시작되는 3월부터 추수 전까지 분무기 판매 및 수리비로 생활하고 있다는 정규승 장인은 주문 제작이 있는 경우를 빼곤 수입이 없는 추수가 끝나는 시기에 맞춰 내년 2월까지 문을 닫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필자가 가게 한편에 납과 납땜용 인두, 야외용 가스레인지가 목장갑과 함께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있자 정규승씨가 서천의 함석쟁이들 나만 빼고 오래 살지 못하고 저 세상 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함석을 이어 붙이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불에 달군 인두와 염산을 이용해 납땜 해왔는데 뭔 건강이 좋겠어라면서 그 역시 5년 전 건강검진 결과 폐쇄성 폐질환 진단을 받아 국내 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이후 112달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약을 달고 산다고 말했다.

마지막 바람을 묻자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함석을 손에서 놓지 않을 생각이라면서 함석을 종이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만큼 주문만 하면 무엇이든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전화)줘유라면서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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