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은 성이며<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성을 따름이 도요<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도를 닦음이 교다<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이 문장은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 초두의 글이다. 옛글이란 것이 호랑이 담배물던 때의 고리타분한 글쯤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분명 미욱하다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내일을 알고자하는 자 과거<옛글>부터 공부하라했다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의 말이라 전한다. 조광윤은 이름 윤胤<맏아들 윤> 자에서 보듯이 927년 후당의 수도 낙양에서 근위장교 조홍은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집안의 가난을 견디다 못해 입 하나라도 덜고자 17세에<혹 이본엔 19세로 기록됨>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아다닌 인물이다. 곧 강호삼학중 하나라 불리는 공자께서 14년간 했다는 철환주유轍環周遊학을 공부한 셈이다.
3백여 년 전 위진남북조의 오호십육국시대의 분열을 천하통일했던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과 대비한다면 양견은 날 때부터 명문거족에 으리으리한 부잣집 가문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조광윤은 그야말로 명태조 주원장보다는 낫겠지만 거의 빈민가 출신이나 진배없던 셈이다. 핑계같지만 가난한 군관을 아버지로 둔 탓에 어려서는 공부를 전혀, 책 한 글자 볼 기회조차도 얻지 못했다 전한다. 훗날 그는 어른이 되어서는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이 어디를 가든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틈틈이 책을 읽었다고 전하는 인물이다.
이런 조광윤에 대해 1776년 정조 즉위년 8월 8일 정미丁未일<정조실록 2권> 조선22대 군주 정조는 맹자孟子 경계장經界章을 강하면서 말한다. 하늘이 임금을 만들어 놓고<천지소이작지군天之所以作之君> 스승을 만들어 놓은 까닭은<작지사자作之師者> 백성을 위한 것이다.<위민야爲民也> 송나라 태조가 이른바 짐朕이 백성을 위하여 지킨다<송宋 태조소위짐위백성수지자太祖所謂朕爲百姓守之者>고 한 것은 진실로 절실하고 합당한 말이다.<신절당어야信切當語也> 또 말하기를<우왈又曰> 송나라 태조가 비록 학문에 종사하지 않았으나<송宋 태조수부종사어학문太祖雖不從事於學問> 또한 현철한 임금이다.<역철벽야亦哲辟也>
조선의 성군 정조께서 중국의 황제 송 태조 조광윤을 평한 대목이다. 여기서 ‘송태조는 학문에 종사하지는 않았으나’하는 대목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송 태조가 어려서는 가난 탓으로 공부할 기회조차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 것은 맞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황제가 된 후에도 장장 다섯수레 분량의 책을 늘 끌고?다니면서 읽었다는 사실은 정조로서도 좀체로 인정하기 힘들었으리라.
정조는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한 임금이다. 세상에서 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약간 이해 불가의 벽이 있는 분이시다. 공부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욕심이 많으셨던 분이다. 그가 공부에 이토록 치열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의 스승의 지나칠 정도의 가르침 탓이다. 그의 스승 몽오는 22세인 1750년 영조26년에 생원·진사시 입격 후 40세인 1768년 군수郡守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 되어 왕세손 필선弼善으로 정조와 연이된다. 이때 가르쳤다는 것이 율곡이이의 격몽요결을 필선으로 우암 송시열이 일생을 두고 정리했다 전하는 주자학에 관한 글들이라전한다.
몽오의 학맥은 율곡으로 사계로 우암으로 한수재 권상하로 남당 한원진으로 강동팔학사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풍을 따른다. 그의 형이 산림의 대학자 김종후金鍾厚로 민우수閔遇洙의 문인인 탓이다.
민우수閔遇洙는 정암貞庵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의 아들로 민진후閔鎭厚는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민진원과 민진영의 형으로 민유중閔維重의 아들이다. 민유중의 처는 동춘당 송준길의 외손녀로 명성황후의 5대조이다. 스승은 우암 송시열이다. 몽오夢梧 김종수金鍾秀는 독립운동가이며 임정부주석 김규식의 종고조부요 모친은 풍산 홍씨는 홍석보洪錫輔의 딸이며 부인은 홍문관교리를 지낸 윤득경尹得敬의 여식이다. 외척으로는 혜경궁 홍씨와는 6촌간이고 풍운아 홍국영과는 12촌지간이다. 송나라든 조선이든 결론은 공부는 많이 하고봐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