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어린 시절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늘 제기를 펴고<상진조두常陳俎豆> 놀며 예와 용모를 갖추었다<설예용設禮容>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분수령이 되는 7세 이전의 설예용의 시기와 7세부터 15세 이전의 오소야천吾少也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9-6문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루는 자공이 재상인 태재를 만나고 온 일을 공자께 말씀드렸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면 이렇다. 태재가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묻는다.<태재문어자공왈大宰問於子貢曰> “공자 선생님은 성인이십니까?<부자성자여夫子聖者與> 어찌 그렇게도 모든 일에 능하십니까?<하기다능야何其多能也>”
여기까지 말하니 공자께서 들으시고 크게 웃으시며 말씀하신다.<자문지왈子聞之曰> “태재가 나를 알아보는구나.<태재지아호太宰知我乎> 나는 어려서 천했기 때문에<오소야천吾少也賤> 천한 일도 많이 할 줄 아는 것이다.<고다능비사故多能鄙事> 그렇다고 군자쯤 되어 많은 일에 다 능해야 하는가.<군자다호재君子多乎哉> 꼭 그렇지는 않다.<부다야不多也>”
세 번째 시기는 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2-4문장의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의 시기이다. 공자께서 15세에 이르러 공부에 뜻을 뒀다는 그 시기이다. 사람의 일에는 특히 어린 시절에 갖추어야할 강령綱領이라는 게 있다. 윤재근 교수의 논어책 5쪽의 말을 빌어 옮겨쓰면 사람의 생각에 벼리綱가 있고 그 벼리에 붙어 있는 가지領들이 있어야 사람의 일도 나무처럼 된다
남북조시대의 주석가 황간黃侃의 말로 쉽게 풀어쓰면 어려서 온고溫故의 공부를 통해서 곧고 바르게 크라는 말쯤으로 이해되는 말이다. 황간은 어려서의 공부를 크게 두 개로 말했는데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의 공부라 한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으로 지식을 더해가라는 말로 온고溫故는 옛 것을 배움이요 지신知新은 새로운 것을 안다는 말이다. 논어論語위정爲政2-11문장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옛것은 안배우고 새로운 것만 익힌다면 그 공부의 균형이 안맞는다는 데 있다. 옛것의 공부라는 것은 어찌보면 시대착오적이요 고리따분할 듯해 보이나 옛것에 대한 공부는 기본이 되는 공부임에는 분명할 터, 기본이란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뭔가를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옛것에 대한 공부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옛것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공부를 꼽는다면 아마도 논어가 그 압권일 것이다. 논어라는 책은 어떤 책인가. 공자와 제자들의 담론을 공자의 서열 세 번째 제자 자공이 공자 사후 공자묘 옆에 움막을 짓고 6년간 시묘를 살며서 스승을 그리며 1차정리를 했다고 전하는 책이다.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공자가어孔子家語 卷47 기록은 이렇다.
“공자는 죽어 노나라 성 북쪽 사숫가에 묻히니<공자장노성북사상孔子葬魯城北泗上> 제자들은 모두 3년상을 했다.<제자개복삼년弟子皆服三年> 오직 자공만이 공자의 무덤가에 려막을 짓고<유자공려어총상唯子貢廬於塚上> 6년을 시묘를 살은 후에 떠나니라.<범육년연후거凡六年然後去>”
이렇게 완성된 논어 1차본은 후학의 손을 거쳐 수많은 전적들과 함께 주석서들이 나오는데 그중 고주라는 이름으로 불후의 서가 전한다. 고주古注는 옛날에 있었던 최고最古의 주석서이라는 미칭을 갖는다. 고주는 주자朱子(1130-1200)의 ‘논어집주’가 나오기 훨씬 이전시대인 삼국시대 위나라 하안何晏193-249의 ‘논어집해’, 남북조시대 양나라 황간黃侃488-545의 ‘논어의소’, 북송시대 형병邢昺932-1010이 하안의 주에 ‘정의’를 달아 소疏를 부안설한 ‘논어주소’ 이다. 이를 논어 고주 삼대주석서라 한다. 이것을 한권으로 압축해서 낸 책이 주자의 논어집주이고 또 이를 한권으로 재해석한 인물이 조선의 선비 다산 정약용의 옛 책과 지금의 책을 모두 망라하여 주석을 새롭게 냈다는 제하의 ‘논어고금주’가 그것이다.
옛말에 공부한 만큼 보이고 책 읽은 높이만큼 큰다고 했다. 다소 과장이 섞였겠지만 다산 정약용은 6세 때에 하루에 책을 등에 잔뜩 짊이고 다니면서 읽었다 전한다. 그중에 매일 빠지지 않고 읽었다는 책이 논어라 한다.